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이름이 멍석딸기지요? 멍석딸기는 넝쿨을 옆으로 떨치지 않느냐. 멍석처럼.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열매가 크지요? 잎도 크고 꽃도 크니까 그렇겠지.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맛이 신가요?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수숫대. 수숫대와 옥수숫대 밑동에는 설탕이 들어 있다. 공기뿌리가 삥 돌려난 마디의 바로 윗마디를 잘라 이로 껍질을 벗겨내고 뚝뚝 베어먹었다. 입술이며 입속을 베기 일쑤였다. 단물을 다 빼먹고 빡빡해진 섬유소를 뱉어내면 핏물 스민 것이 보이기도 했다.

 까치밥. 양지꽃과 꽃다지와 지칭개와 제비꽃이 피는 봄의 논두렁과 길섶에는 까치밥이 여물었다. 신부 족두리에 꽂혀 있는 영락(瓔珞)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까치밥을 한 움큼 뽑아다가 여린 불에 슬슬 그을린 다음에 톡톡 떨면 좁쌀보다 더 잔 씨알들이 새파랗게 떨어졌다.

 일찍 죽어 사람들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인 윤택수의 박물지에서 아무렇게나 몇 구절을 뽑아봤다. 셋 다 요즘 사람들에겐 낯선 식물들이다. 상품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다들 잊어버린 멍석딸기와 수숫대와 까치밥을 새삼 호명하는 것은 이런 이름들을 발음할 때 내 마음속 어떤 현이 핑그르르 울려오는 까닭이다. 수숫대를 씹느라고 생겼던 생채기의 비릿한 피맛까지 혀 위에 잠깐 감돌다가 사라진다.

 박물지란 동물·식물·광물, 지질의 성질이나 현상을 관찰해 기록한 글이다. 윤택수 박물지의 평범한 몇 구절은 내게 와서 이렇게 시가 되었다. 그건 생채기의 아린 맛을 잊지 않은 특별한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아직 오관이 여렸던 열 살 이전에 각인된 감각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놀라운 장면을 봤다. 온통 대통령 후보들의 시시콜콜한 말과 행적을 나열하는 화면에 지칠 무렵 카메라는 어느 초등학교 교실을 보여줬다. 아이들 몰래 칠판 위에 장착했던 카메라가 찍어낸 광경이었다. 화면 속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운동장에 나가 놀지 않았다. 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교실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든 아이가, 한두 명만 빼고는 스마트폰 액정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아이도, 떠드는 아이도 없었다. 바로 곁에 또래 친구들이 잔뜩 있는데 실제 친구와 얘기하는 대신 혼자서 게임을 즐기거나 문자로만 대화하는 아이들! 그들은 수업시간에도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이미 익숙하던 풍경이지만 교실 안까지 이럴 줄이야!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는 아닐지라도 힘이 빠져 더 이상 들고 있지 못할 만큼은 놀랐다. 그들에게도 박물지가 읽힐 수 있을까. 식물과 동물과 광물의 생태와 성질에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까. 나무와 풀과 개와 고양이와 강물과 하늘의 변화에 대해 자기 나름의 관찰과 기억을 나눌 수 없다면 아이들은 나중에 무슨 이야기로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갈까. 스마트폰의 기능과 자동차의 디자인과 명품 가방의 가격에 대해서? 자연을 사랑하는 훈련을 거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구식 인간이라 만물은 존재 자체로 이미 시(詩)라고 생각했다. 시란 진리를 요약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어떤 대상이든 오래 곰곰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안에 시가 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나무와 햇볕과 공기와 다르지 않은 존재이고, 개미와 노루와 코끼리와도 서로 연결된 생명이며,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중에, 세상만물이 근원에서 이어지고 서로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떠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의 시간을 뭉텅이로 뺏어간 이 휴대전화는? 그 안엔 생명이 없다. 유행 따라 곧 폐기해야 한다. 천금 같은 우리 아이들이 이런 기계만을 매일같이 들여다봐도 정말 괜찮은 걸까?

국가경쟁력은 산업이 아니라 개개인의 행복에서 나온다. 개인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라가 부강해서 어디다 쓸까. 멍석딸기와 까치밥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놀잇감과 먹잇감을 ‘박물들’ 속에서 찾는 방도를 어른들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생명에 전율하고 우주에 감사할 수 있다. 새 대통령은 부디 행복의 총량을 높여주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이 뽑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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