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읽는다 - 조완춘위성지도.webp

 

 

 

나는 가끔 위성지도로 길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고향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더욱 재미있다. 고향은 603번 지방도로와 32번 국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서해로 뻗어나간 두 개의 노란길 사이, 초승달 모양의 저수지에 둘러싸여 있다. 집은 초승달의 배꼽처럼 남아 몇 번의 탈바꿈을 한 채 지금껏 남아 있다. 소년기까지 머물던 우리 마을을 오지였다. 집을 벗어나 20분은 족히 걸어야 건넛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집에서 시작된 길 하나가 바다로 나갔다. 썰물 때는 길게 늘어나고 밀물 때면 짧게 줄어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발길에 다져졌는지 파도도 망가뜨리지 못한 반질반질한 길이다. 길은 사람들의 이동경로인 동시에 물산의 이동경로이기도 하다. 서해안에서 선사 이전의 패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바닷길의 시작도 그 무렵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바지락, 꽃게, 낙지, 소라 등 갯벌이 내어주는 먹거리가 많은 고장이었다.

위성지도를 키워보면 웬만한 집과 고샅길이 속속들이 보인다. 저기에 내 기억까지 소환하면 나는 마치 소인국을 들여다보는 걸리버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다.

초승달의 배꼽은 작은 알집이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내가 마당을 벗어나고, 이웃 마을 당숙댁에 심부름을 가고 또 초등학교를 가고…. 갓 부화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풀잎을 딸라 자리를 옮겨가듯 자꾸 행동반경을 넓혔다. 그러고 보면 나의 성장이란 점차 반경을 넓혀가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시오리 길의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중고등학교, 직장, 결혼의 순서로 나는 자꾸 행동반경을 넓혀나갔다.

60년대 시골길은 교통수단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들길, 산길을 걸어야 했다. 늘 같은 길을 오가는 일이 단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름길을 벗어나면 바다가 보이고 옹달샘이 솟아나는 숲도 나타났다. 산딸기를 따고 꿩알을 줍는 날도 있었다. 게와 고동을 잡는 날은 밀물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열중하다가 물길에 포위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다. 그렇긴 해도 낯선 길일수록 호기심 천국이었고 동화의 세계였다. 어쩌다 산중에서 맞닥뜨린 거대한 암벽 앞에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처럼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길에서 나는 세상을 두루 배워나갔다.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과 많은 경험들, 길은 경계였고 수단이었으며 인생이고 역사였다. 길을 알아가는 일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한 방편이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열다섯 번 집을 바꾸는 동안 그 세상은 점점 넓어졌다. 매번 이삿짐을 풀고 나면 우선 길부터 익혔다. 학교, 동사무소, 시장과 동네, 그리고 이웃 마을과 연결되는 통로…. 길은 언제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스마트폰 GPS를 연결해서 자신의 행적을 보는 일도 신기하다. 한때 마라톤을 열심히 하던 시기가 있었다. 보통은 한강으로 나가 야경을 즐기며 달리지만, 여의치 않을 때면 인근 학교 운동장 트랙을 돌기도 했다. 훈련한 거리를 확인하게 되는데 10km를 뛰면 400m트랙 25바퀴다. GPS를 확인하면 스물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중첩되지 않고 조금씩 모습과 위치를 달리해서 나타난다. 그 미묘한 탈선은 아름다운 장미꽃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영상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온종일 살림을 하며 집 안을 맴도는 궤적을 그런 방법으로 밝힐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무수한 꽃을 피워낼 것인지를 즐겁게 상상했다.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면서부터는 발에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수도권을 벗어나고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바다 건너 세상까지 기웃거리게 됐다. 한번은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서 광활한 내륙을 내다보고 되었다. 구름 한 점 없어 시계가 투명했다. 고비사막을 지나 고원이 시작되는 어디쯤이라 짐작했는데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잿빛 대지 위에 실뭉치 몇 개 무심히 굴러간 정경, 가늘디가는 길들이 더러는 교차하고 휘어지면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사냥감을 찾는 한 마리의 매처럼 그림자를 낮게 드리운 채 거대한 지도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위성지도를 펼친 듯 크게 확대된 지형과 길들이 스크롤 되고 있었다. 간간이 길들이 연결한 작은 촌락과 흔적만 남은 건천들이 쓸쓸한 여운을 남겼다. 저 길 어딘가로 낙타의 행렬들이 느리게 이어지고 모래바람은 자꾸 그 시간을 지우곤 했을 것이다. 길이 실크로드라면 그 길 어딘가에는 혜초의 지난한 발자국도 남아 있을 것이다. 길의 시작과 인간의 애환…. 길은 기다림이고 돌아가야만 하는 필사의 의지였다.

길에 대한 나의 호기심엔 끝이 없다. 길은 사람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문명과 더불어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길, 우주로 가는 길도 열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날 나는 광대무변한 허공에서 아주 낙은 초록 행성을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지금껏 내가 세상의 전부라고 여겨왔던 길들의 집합체를.

세상의 길들은 촘촘한 그물망이다. 그 길은 실핏줄이어서 쉴 새 없이 피돌기가 이루어진다.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지 몸이 반응하듯 길의 생리 또한 다르지 않다. 길이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길을 볼 때 자신이 있는 방향에서 바라보게 된다. 걸어온 길도 나아갈 길도. 나는 길 끝에 있기도 하고 또 시작점에 있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길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에 두는 순간부터 길이란 회로에는 불이 켜진다.

오래 전부터 바이칼 호수에 마음이 꽂혀 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문명의 시원을 찾아서>를 읽은 뒤부터 바이칼은 신비와 경이의 대상이었다. 우리 한민족의 발원지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이동경로를 따라가는 문화탐방 프로그램이었다. 부랴트 족의 생김새나 토속신앙과 그들의 신화는 우리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전통과 생활습관, 조리법까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문화계의 관심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이우 몽골이나 바이칼 주변, 캄차카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행상품이 개발됐지만 나는 다녀오지 못했다. 좀 더 차분한 준비를 한 후에 가도 늦진 않으리라.

울란바토르, 울란우데, 알흔 섬, 이르쿠츠크…. 익숙한 지명 몇 포인트에 불이 켜졌다. 어느 길로 갈까? 비행기로 갈까 아니면 기차를 이용할까? 몇 번이고 지도를 펴고 길을 읽는다. 내 생애 마침표가 찍힐 때쯤에야 나의 길 읽기는 비로소 멈추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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