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작은 섬 물가에 / 손광성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처음 안 것은 내 나이 스물여섯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스물여섯이란 눈부신 나이, 그 나이에 그는 죽고, 나는 그를 알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는 반세기라는 시간의 갭이 놓여 있었지만 젊음은 그것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1961년, 나는 그때 시골 중학교 교사였다. 5월에 군사혁명이 터지자 6월에 사표를 내야 했다. 병역미필이 그 이유였다. 군에 지원했다. 그러나 입영 날짜까지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석 달이란 유예된 시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침 먹고 나가면 다방에서 오전을 죽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극장에서 오후를 죽였다. 매일 대한극장이나 단성사 같은 개봉극장에 갈 형편이 아니어서 두 편씩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을 이용했다. <심야의 탈출>이니 <OK 목장의 결투>니 하는 것은 모두 고마운 그런 삼류극장에서 본 영화들이다. 어떤 장면도 예외없이 비가 내리고, 어떤 결정적인 장면도 예외없이 허옇게 끊어지고 말던, 한물간 영화들, 내 젊은만큼이나 남루했다. 때로는 세 번이나 같은 것을 보기도 했다. 시간은 게으른 소였다.

1961년 여름은 그렇게 지루하게 지나갔다. 흥미 위주의 책을 택했지만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은 것도 그때였다. 그때만 해도 금서목록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번역된 것이 없었다. 영문판도 일본서 몰래 들여온 것을 복사한 해적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서점에서 얄팍한 잡지 한 권을 샀다. '문장'이라는 잡지였다. 어떤 글을 읽다가 인용된 시 한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시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 글의 내용도 필자도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다쿠보쿠의 시만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세 개의 연으로 된 한 편의 시처럼 인용된 이 시가 실은 각각 독립된 세 편의 단가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외곤 한다.

동해 작은 섬 물가에

내 홀로 눈물 지으며 게와 노닌다.

모래섬 모래 위에 엎디어서

첫사랑의 아픔을 생각하는 날에

벗들이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엔

꽃을 사다 아내와 즐긴다.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번역본보다 이 번역시를 좋아한다. 근 반세기 동안 내 영혼과 함께 해 온 때문이리라. 특히 "벗들이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엔/ 꽃을 사다 아내와 즐긴다"는 대목에 와서 매번 목이 메곤 했다. 이 시를 통해 나는 슬픔을 굴절시키는 법을 처음 배웠다. 그건 마치 눈물이 흐르려고 할 때 먼 산을 바라보는 자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또 늘 향수에 젖어 있었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역에 나가서 고향 사투리를 듣는다"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또 그리움을 삭이는 법을 배웠다.

나도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그런 의미에서 내 젊은 날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아니, 그후에도 좌절의 순간마다 나를 어루만져 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부자가 줄 수 있는 것이란 그리 많지 못하다. 노상 빚에 쪼들리던 가난뱅이 시인이 더 많은 것을 주었다.

나는 그가 그처럼 그리워하던 그의 고향 시부타미에 가 보고 싶었다. 갈 수 없는 내 고향 대신 갈 수 있는 그의 고향이라도 가고 싶었다. 혼자 걸었을 그 많은 오솔길을 그의 외로운 마음과 나란히 걸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일본 여행은 오랫동안 미루어졌다. 시부타미에 간 것은 2004년 5월이었다.

그러니까 마음먹은 지 43년만이었다. 그가 잠시 임시 교사로 재직했던 학교의 삐거덕거리는 나무 층계를 한 발 한 발 디디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젊은 열정을 바쳐 학생을 가르치던 교실에 가서 그의 학생이 되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보았다. 열세 살에 사랑을 시작하고, 열세 살을 더 살다간 시인, 자살하려고 갔던 하코다테 바닷가에서 결국 자살은 하지 못하고 게외 놀다 돌아온 어린애 같은 마음,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비록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생활력도 성실성도 부족했지만 그의 이런 맑은 마음을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그래서 그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게를 한 마리를 그려서 그의 고독했던 심정을 대신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두 마리를 그렸다. 왼쪽에 있는 한 마리는 시인이고 그 옆에 있는 한 마리는 나라고 해 두고 싶었다. 내 젊은 날 절망의 순간마다 날 죽지 않고 일어설 수 있게 해준 그의 슬픈 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이 그림을 그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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