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를 하려고 번거롭게 일을 벌려 놓고 있다. 내가 수필을 쓸 때 제목을 먼저 정하고, 소재와 주제를 설정해 구성 하는 것과도 같다.
반죽하는 것이 가탈을 부리는 애인처럼 까다롭다. 너무 물기가 많아도, 적어도 안 된다. 대충해서 통하지 않는 것이 반죽의 물이다. 물의 양을 정해 놓은 공식은 없다. 짐작으로 해야 하니 요령이 없으면 어렵다. 수필에도 정확한 공식은 없다. 소재에 어긋나면 주제가 엉키고 일관성이 없게 된다. 그리고 여러 번을 쓰고 난 다음에야 풀어내기가 조금씩 수월해진다.
반죽하는 요령은 체험이 그 바탕이다. 그런 것을 딸아이가 반죽을 하겠다고 극구 나선다. 차분하게 잘한다 싶더니 어느새 물기가 많다며 울상이다. 밀가루, 물, 또 밀가루, 물을 넣으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내가 수필을 쓰면서 살을 붙였다가 가지를 치고 하는 것과 아이가 반죽하는 것이 흡사해 보인다.
이와 비슷한 일은 어릴 때 내가 동생에게 이발을 해주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다 잘랐다고 보면 한쪽이 길고, 긴 쪽을 조금 자르면 또 반대쪽이, 그러다 머리 모양새를 아주 우습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시행착오는 삶의 밑거름이자 전환점인지도 모른다.
딸아이는 반죽하는 것이 많이 서툴다. 그래도 어깨 너머로 종종 보았기에 이 만큼이라도 한다. 일이란 열 번 보는 것보다 한번 해 보는 실습이 낫다고 내가 다독거려준다. 어머니가 내게 한 것을 나도 모르게 딸한테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 어쭙잖은 말과 행동이 내림인가.
무슨 일이던 해보지 않고 쉽다고 할 수 없다. 나도 수필을 읽기만 했을 때 이 정도쯤은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필 쓰기가 내게는 태산 오르기다.
오빠가 학창시절에 시를 즐겨 썼다. 학생 잡지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그것이 부러워 나도 열심히 흉내를 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십수 년 동안 내 안에 든 감성은 묵정밭이 되어 버렸다.
다시 감성의 밭을 일구겠다고 한 것이 수필의 끈에 묶인 동기다. 열 손가락을 두 번 접을 세월 동안 묵은 잡초를 뽑아내고, 자갈을 걷어 내느라 여려가지 문화를 접한다. 오래도록 쌓여 있던 앙금은 씻어내고,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눈도 키워나간다. 아픈 일, 답답한 일을 수필로 풀어내야 가슴이 툭 트인다. 또 어떤 사물과 사람이 정말 좋아 보여서, 너무 슬퍼 보여서, 안쓰러워서, 자연이 참으로 아름다워서라는 등 갖가지 이유를 내 세워 수필을 쓰게 된다.
하지만 쓸수록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물기가 많은 반죽처럼 글이 쳐지고, 너무 간결하면 물기 없는 반죽처럼 건조해진다. 무르지 않으면서 녹녹한, 단단하지 않으면서 차진 반죽이 잘된 것이다. 수필도 그래야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려면 온갖 것을 다 보고, 체험하고 느끼고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니 시야가 좁은 내게는 늘 버거운 대상이다.
그런데도 수필을 아주 내팽개치지 못하는 것은 늘 잡다한 일로 어수선해질 때 마음에 평정을 주고, 끈끈한 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이다. 나는 소설은 밥, 시는 약, 수필은 정이라고 생각한다. 밥도, 약도 중요하지만 정도 그 못지않다. 진솔한 수필 한편에서 그 사람의 삶이 오롯이 정으로 와 닿는다. 또 수필 한편을 쓸 때마다 자신을 뒤돌아보게 해 주고,, 마음을 비워내는 연습을 시켜주니 인생 공부가 아니겠는가. 이런 수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짝사랑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딸아이가 한 반죽이 모양새가 삐뚤삐뚤하다. 내가 다시 손으로 꾹꾹 눌러 동그랗게 모아놓는다. 반들반들하다. 써 놓은 글을 퇴고하는 과정 같다. 퇴고가 잘 된 글은 문장이 매끄럽다. 그러나 내 경우는 퇴고를 몇십 번 넘게 해도 이 반죽처럼 마무리가 안 된다. 그럼에도 내 딴에 최선을 다했다고 억지를 부린다. 설 끓은 수제비가 제 맛을 못 내듯 덜 된 글이 공감대를 형성하기란 어렵다.
그렇지만 수제비를 끓일 때 반죽을 떼어 넣는 것은 크다가 작다가 한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수제비가 반디 돌처럼 얇고 작은 것을 좋아하셨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큼직큼직한 것을 좋아했다. 수필도 개성 따라 쓰고, 취향 따라 보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쓰고 또 써야 수필의 길이 트인다는 것도 전적으로 믿는다.
수필 쓰는 것을 높은 산에 오르는 것으로 친다면 아직도 나는 산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여럿이 산행할 때 초입에서 같이 시작해도 사람의 체력에 따라, 또 쉬엄쉬엄 가는 것과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는 것에 따라 층층이 거리가 생긴다. 수필 쓰는 것도 능률과 진도가 있다면 산행과 같을 것이다.
반죽할 때 가루에 식용유 몇 방울을 섞으면 손에 달라붙지 않는다. 수제비도 더 쫄깃하다. 수필에도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가면 쌈박할 것이다. 그것을 터득하기가 이리도 어려워서야. 하기는 반죽을 자꾸 한 그 경험 끝에 이 비법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수제비는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면 찬대로 맛이 난다. 수필도 수제비처럼 쫄깃하면 감동이 깊다. 나도 그런 수필을 쓸 수 있을까. 영원히 희망사항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 꿈은 접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진퇴양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