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조이섭
세상은 많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양이나 크기는 다르겠지만 문을 거치지 않고는 어디든 드나들지 못한다.
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가를 주고받는 데 따라 몇몇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돈을 주거나 표를 끊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박물관이나 놀이 공원처럼 대가를 치르고 들어가면 유익함을 얻거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정해진 시간과 규칙 내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장받는다.
그와 반대로 대가를 받기로 약속하고 들어가는 문이 있다. 공장이나 회사의 문을 통과하는 경우다. 요즘은 이 문을 들어가기, 취직이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나의 즐거움과 시간을 포기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기로 하고 그 문을 들어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어찌 즐겁기만 하랴.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하는 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즐거움으로 느끼지 못하면 하루하루가 지겹다.
어느 심리학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일을 소명(calling)으로 여기는 사람과 단순히 생계 수단인 직업(job)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한다. 전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엇인가를 기여한다고 믿는다. 후자는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생계 수단이란 점 외에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 당연히 전자는 후자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컸고 보수에 따라 이직률도 낮았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증명해 주는 연구 결과였다.
세 번째 유형은 아무 대가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즐거움이나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각자가 스스로 캐내거나 찾아야 한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은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일심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인생의 문은 시간을 거슬러 제 맘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인생의 문은 미꾸리를 잡는 통발처럼 앞으로만 갈 수 있는 일방통행인 까닭이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중의 어느 문이든 그 문에 들어가면 크든 작든 성과를 내어야 한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그것들의 합(合)이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바로 아래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어둠을 감추고 하늘을 향하고 있는 우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빼꼼 안을 들여다보고 힘이 들 것 같으면 발을 빼거나 단단한 자물쇠로 대문을 잠그고 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서 국외자, 이방인 명찰을 달고 마냥 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우회하거나 틈을 만들어 통과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선택했던 문은 도미노 조각처럼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도미노 조각(門)들이 빗줄기의 빗금처럼 쓰러지기 시작하면 문고리를 잡고 매달렸다. 산굼부리에 문이 있을 때는 안간힘을 쓰며 언덕을 올라 두드렸다. 지나온 길에 좁은 문, 어렵고 고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온한 들판과 포도(鋪道)위에 난 문을 지날 때는 상쾌한 산들바람에 이마의 땀 한 줌을 식힐 수 있었다.
인생을 끝없는 여정이라 하듯이, 삶이란 문을 하나씩 여닫으며 앞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지금 서 있는 문은 지나온 문의 결과이고 뒤미처 만날 다른 문의 원인이다. 문은 열고 닫는 역할뿐만 아니라 소통을 위한 길이었다. 내가 지나온 문들은 원인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원인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여닫고 지나왔지만, 여전히 새벽안개처럼 흐릿하다. 청소년기에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못한 탓이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온다.
내가 다시 청소년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먼저 목표를 세우리라. 그런 연후에,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놓인 작은 문들의 빗장을 하나씩 열어야 하리.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으며, 넘지 못할 시련 또한 없다. 양손에 겸손과 배려를 하나씩 쥐고 실패와 시련을 웃으면서 넘어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