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외로움에 대하여 / 최민자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의 짧은 시가 요 며칠 자꾸 뇌리를 맴돈다. 눈앞의 공허를 맞닥뜨리기보다 지나간 발자국이라도 돌아보는 일이 그래도 덜 외로운 일일까. 글쓰기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지나쳐 온 궤적을 돌아보는 일로 잡히지 않는 현존을 환기해 보려는.
쓰는 일을 내 존재의 동력이라고, 덧없는 삶에 대항하는 덧없는 부적이라고, 어쭙잖게 규정했던 적이 있다. 일상의 상투성과 동일성을 미학적 시선으로 변주해냄으로 존재론적 허무를 상쇄해 보려 했던, 나름 진지한 허장성세였겠다. 그러나 요즘처럼 원고지도 한글파일도 아닌 페이스북 같은 데에 캐주얼로 올리는 일상적 족적들을 존재의 동력이라고 밀어붙이는 일은 시쳇말로 좀 허접해 보인다. 존재의 동력이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동력이 존재의 허망함 또는 외로움이라는 게 더 타당한 진술일 듯도 싶고.
골목 어귀, 잡풀 더미 속 스티로폼 박스에 겨우겨우 피어난 구절초 앞에 멈추어 있다. 섬과 섬의 뿌리가 대륙붕 아래에서 잇닿아 있듯, 존재란 어쩌면 한 뿌리의 거대한 고독에서 싹이 터 제각각의 바람결에 흔들리다 사위는 천만 송이 외로움 같은 것 아닐까. 결국 지고 말 꽃이라 해도 목숨의 한때, 생명의 저 안쪽으로부터 길어 올린 광채를 누군가 응시하고 주목해준다는 것, 스러져 갈 생명끼리 소통하고 교감하고 위무하고 찬탄하며 사는 일의 헛헛함을 잠시 잊어본다는 것, 글쓰기도 내게 그런 의미쯤이겠다. 대상이나 사물을 도구적 유용성의 층위로 지나치지 않고 질료적 본성을 들여다보며 교집합을 찾는 존재론적 성찰이 문학이라면 말이다.
썩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편들어 황제에게 진언했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완성하라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사형보다 못한 궁형을 택한다. 그가 그렇듯 치욕스런 상황을 견디어가며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제 안의 문채文采를 후세에 전해 실추된 명예를 복원해 보려는 확고한 결기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사마천 같은 절절함도 없거니와 죽은 뒤의 영광 따위는 털끝도 관심이 없는 내가 왜 시시한 일상의 이야기나 영혼의 미미한 지문 따위를 중인환시리衆人環視理의 광장 같은 공간에 시나브로 발설하고 있는 것일까. 하등 중요하지도 않은 서사를 습관적으로 문서화하는 고지식한 필경사처럼. 스러짐에 대한 항명, 소멸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인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둘러대는 관계의 저변에는 외로움이라 이름하는 가축 한 마리가 후미진 귀퉁이에 제각각 순치된 채 출구를 모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촘촘하게 교직된 전 지구적 초인류, 그 거대한 매트리스 속 미미한 점으로나 존재하는 우리에게 외로움은 교착을 파기하고 혈맥을 소통시키는 비장의 전해질이나 은나노 와이어 같은 것 아닐까. 디지털과 코로나의 그늘 속에서 갈수록 파편화, 단자화되어 가는 세상이지만 존재란 기실 차갑게 객관화된 '있음'만은 아닐 것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아니라 연결됨으로써 사람이다. 외롭지 않으면 소통하지 않을 테고 소통이 없이는 교감도 없을 터, 외로움은 떨쳐내야 할 부정적 감상이나 존재의 어떤 불순물이 아니다. 불완전한 개별자인 인人을 인간으로 접속시켜 완성하는, 존재의 원형질이고 상생의 질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