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 또 건배! / 허창옥
오래전에 <속에 천불>이란 제목의 글을 썼었다. 짧은 산문이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지나가면서 ‘속에 천불’이란 간판을 봤는데 정말 속에 천불이 나서 쓴 게 아닐까 싶게 정돈되지 않은 글씨 옆에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누런 양은주전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선술집이었다. 속에 천불이 나면 와서 막걸리 한 사발 벌컥벌컥 마시고 가라는 뭐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그때, 막걸리주전자를 보면서 젊은 나이에 죽은 오빠를 생각했다. 술로 날이 저물고 날이 새는 세월을 살다 간, 술에 잠식당한 그 생애를 생각하면서 쓴 글이었다.
오늘, 낮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걸어가는 취객을 한참 바라보았다. 불현듯 그때의 막걸리주전자가 생각났고 연이어 그를 떠올렸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잊혔는데, 잊고 사는데, 이따금 담이 결리듯 뜨끔뜨끔 그가 생각난다. 그는 어린 아들 셋과 젊은 아내를 두고 갔다. 그의 아내는 아들들을 잘 키웠다. 아버지와는 달리 셋 다 든든한 가장이 되어 있다. 그의 아들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러면 그만인데 이따금 그가 사무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의 공저《모든 것은 빛난다》는 표제 밑에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라는 부제를 붙여 놓았다.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의 내용은 깊고 넓으며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무튼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편에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와 그의 소설《끝없는 농담》이 길게 소개된다. 작가 월러스는 복잡하고 난해한 인물이다. 그런 월러스가《끝없는 농담》에서 창조해낸 주인공 돈 게이틀리도 당연히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돈 게이틀리는 리비아교도소의 철창 안에서 알코올금단현상과 강제로 맞닥뜨리게 된다. ‘지옥의 1초 1초’를 버틴다고 할 만큼 그 고통은 심한 것이었다. 실존에 대한 ‘불안과 우울과 도저한 슬픔’이 게이틀리를 몰아치고 있었다. 월러스가 그려낸 돈 게이틀리를 보면서 죽은 오빠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 복잡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냥 술이 좋았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 그저 한량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하루를 살았고 그 다음, 다음날도 그렇게 살았다. 한량? 잘못 본 것일까.
마흔도 되지 않아서 노인의 모습을 하고 떠난 오빠란 사람, 한 번도 제대로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을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 젊었고 그러므로 속이 접시처럼 얕았다. 같이 술독에 빠져서라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애는 써봤어야 옳지 않았을까? 실존에 대한 극심한 혼란이 혹여 그를 허무주의에 매몰되게 한 것은 아닐까? 자아와의 치열한 싸움을 버텨내지 못해서 무너진 것은 아닐까? 여러 물음이 가끔 나를 할퀴지만 너무 늦었다.
그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았기에 그 학습효과 때문에 술을 멀리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와 기질적으로 많이 닮은 것 같다. 내 안에 발현되지 않은 ‘술꾼’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나는 술을 좋아한다. 다만 술 때문에 흐트러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야 할 자리에 앉으면 소주도 막걸리도 맥주도 와인도 한 잔 정도는 맛있게 마신다. 하지만 그 이상은 바로 제동이 걸린다.
더러는 저녁 식탁에서 남편과 반주로 소주 한 잔씩 한다. 반찬이 딱 안주 같을 때이다. 그럴 때 한 잔 마시는 소주는 참 맛있다. 그래도 한 잔 더 마시지는 않는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자유로워져도 좋을 만큼 나이를 먹었음에도 술을 한 잔 더 마시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한 잔 술을 달게 마시는 진정한 애주가다. 뭘 그리 억눌려서 그러느냐 할지 모르겠다. 억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다.
지난날 속의 그도 때로는 아름다웠다. 큰물 졌을 때 나를 업고 물이 콸콸 흐르는 큰 개울을 건너주었던 그를 잊지 못한다.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을 즐겨 부르고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젊고 잘생겼던 남자, 결혼하는 동생을 위해서 한 달이나 술을 끊으며 드물게 책임감을 발휘했던 고마운 사람, 감색 양복 쫙 빼입고 신부인 내 손을 잡고 신랑에게 데려다주었던 멋진 혼주, 그리 떠올려본다. 훨씬 좋다.
정말이지 이런 날은 그와 함께 취해보고 싶다. 상판 문양이 벗겨진 낡은 양은 술상에 막걸리 한 주전자와 묵은 김치 한 사발을 놓고 주거니 받거니 그와 밤늦도록 마시며 속에 천불나는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오, 그러나 그는 없다. 그가 없는 지상에서 나 혼자 건배! 천상의 그를 향해 건배 또 건배!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