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가게의 도적이 되다
성민희 수필가
그러니까 30년 전이었나 보다. 해가 뉘엿뉘엿 산등성이로 주저앉을 무렵 엄마가 전화를 주셨다. “류서방 집에 들어왔나?” 가쁜 숨과 함께 뱉어낸 질문치고는 좀 생뚱맞다. “갑자기 류서방은 왜? 지금 오고 있는 중일 거야.” 엄마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듯 맥이 빠지는 목소리로 어서 TV를 켜보라고 하셨다. 뭔가 심각한 사고가 났구나 싶은 위기감에 얼른 거실로 갔다.
TV를 틀자 모니터 속에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경찰차 두 대가 거리 복판을 가로막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마이크를 든 방송국 앵커가 흥분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는 뒤로는 건물을 태우는 벌건 불길이 마치 용암이 뿜어져 나오듯 하늘로 치솟고 거리는 온통 시커먼 연기다. 땅바닥에 뒹구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유리조각 사이로 흑인들이 각목을 들고 종횡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가만히 어나운스의 말을 들어보니 폭동이라고 한다. 미국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전혀 들어보지 못하던 단어다. 폭동이라니.
곧이어 남편이 벌게진 얼굴로 들어왔다. 회사가 한인타운과 가까운 윌셔 거리에 있기에 흑인 무리의 웅성거림을 보며 퇴근을 했단다. 심상찮은 분위기라는 건 느꼈지만 경찰의 진압으로 곧 가라앉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라디오코리아에서는 심각한 뉴스를 계속 전해왔다. 경찰은 백인 거주 부촌인 베벌리힐즈로 올라가는 길은 막고 한인타운 쪽은 무방비로 열어두어 폭도의 행렬을 한인타운 쪽으로 유도한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분노의 소리로 변했다. 폭도들이 방화를 하고 가게를 부수고 물건을 훔쳐 가도 경찰은 구경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졸지에 한인타운은 무법천지로 변했다는 소식이다. 한인타운이 백인과 흑인의 완충지대가 되어 어이없는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인타운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청년들이 자진하여 속속 모여든다는 뉴스도 들렸다. 이 소식이 나간 지 네 시간만에 한국의 군대 시절 맡았던 보직에 따라 직책이 분배된 일사분란한 군 지휘체계가 갖추어지고 한인타운에는 자체 통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아무도 한인을 보호해주지 않으니 우리 스스로가 타운을 지키자는 자위대의 구성인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된 나라 미국, 그것도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나섰다니.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울컥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미주류 언론에서는 이 폭동을 흑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관에 대한 배심원 판결이 무죄로 나왔기 때문이라며 흑백 갈등으로 조명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백인을 겨냥한 흑인의 분노가 거세어지자 주류사회 언론은 소방관이 산불을 진화할 때 맞불을 놓듯이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소환했다. 그것은 오렌지주스를 훔쳐 가던 흑인 소녀를 한인 마켓 업주 두순자 씨가 사살한 사고였다. 경찰 또한 언론의 자극적인 선동에 힘입어 폭동을 흑백 갈등에서 한 흑 갈등으로 옮겨 취급했다. 한인은 난데없는 언론의 비난과 흑인의 약탈 대상이 되어 비통함과 울분을 견뎌야 했다.
폭스뉴스는 마치 전쟁 영화인 듯 Korea Town 이라는 자막과 함께 약탈 장면에다 신나는 배경 음악을 깔아주며 시청자의 흥미를 유도했다. 어떤 흑인은 활짝 웃는 얼굴을 카메라 앞에 갖다 대며 V자 손짓까지 했다. 성조기를 태우며 날뛰는 모습이 마치 축제를 즐기는 무리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운전자를 폭행하는 폭도를 백인 경찰은 아무런 제재도 하지않고 서로 잡담을 하며 바라 보고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 해가며 TV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밤 2시경에 남편의 친구 K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자신의 가게로 가보고 싶은데 같이 가 줄 수 있겠느냐는 절박한 부탁이었다. 차를 몰고 우리 집으로 달려온 부부를 보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생겼다. 부인은 함께해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차창에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들어가라는 남편의 손을 밀치며 나도 함께 차에 올랐다. 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질척한 느낌을 애써 누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40분을 달려 워싱턴 길에 있는 쇼핑몰에 들어섰다. 아이와 여성까지 가세한 멕시칸과 흑인들이 서로 장난을 쳐가며 상품 박스를 어깨에 얹고 뛰어다녔다. 상점 문과 유리창이 모두 부서져 내린 쇼핑몰은 마치 무장해제당한 패잔병이 넋을 놓고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미용재료상인 K의 가게는 입구에 드리운 철제가드를 차로 들이받고 차체가 상점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마치 자기 물건을 배달 나가는 듯한 여유로 농담까지 해가며 물건을 싣고 있었다. 황망히 가게를 쳐다보던 K가 비칠거리며 가게로 다가가더니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스탑. 스탑잇!” 그 소리는 아무런 효과도 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피해 힐끗거리며 물건을 들고 나갔다. 오히려 히죽거렸다. 한인타운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기에 무사하리라 희망을 걸었는데 이 지경이라니. 여기는 난폭하고 파괴적인 폭도가 아니라 공권력이 사라진 혼란을 틈탄 사람들이 좀도둑으로 나선 것이었다. 대부분은 동네 주민이었고 단골손님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을 들고 와서 공포탄이라도 쏠걸. 남편은 후회를 했다.
차에서 뛰어내린 부인은 가게 앞에 서서 헐근거리는 K의 손을 끌고 왔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물건을 들고 나옵시다. 어서 차를 가게 가까이로 옮기세요.”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부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싼 물건이 무엇인지 K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머리에 이고 도둑 틈에 끼어서 들어 날랐다. 곁의 멕시칸이 조그만 아시안 아줌마의 출현이 이상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를 했다. 우리는 부딪히지 않으려고 서로 몸을 피해 주며 나란히 나란히 뛰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는 꼬마의 팔을 잡아 주기도 하며 그들과 공범이 되어 마구 뛰었다. 정말 난생처음 젖 먹던 힘까지 모아서 도적질(?)을 했다.
가져갔던 SUV 밴이 터지도록 물건이 채워지자 우리는 맥이 풀렸다. 동녘이 조금씩 밝아오고 미친 듯 날뛰던 도적도 모두 떠났다. 남자 둘은 박스를 뜯어 종이 합판으로 가게 문을 덕지덕지 땜질했다. 또다시 난동을 당할지라도 휑하게 뚫린 구멍은 막아야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과 나는 손을 맞잡고 울었다. 우리는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세상 천지에 우리를 감싸줄 품이 없는 고아구나, 무의식 속에 감춰져 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진 둑처럼 쏟아져 나왔다.
K 부부는 망가진 가게의 재기를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고통이나 슬픔에 젖어 막막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용납이 안 되는 현실의 상처를 하루빨리 봉합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보험도 든든히 들었다는 거였다. 넉넉한 보상금과 보험금 덕분에 가게는 어느 정도 정상화가 되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가게를 헐값으로 팔고 플로리다로 떠났다.
4.29 폭동은 한인사회의 정신적인 흐름을 바꾸게도 해 주었지만, 바깥에서 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주류 언론은, 한인은 같은 소수민족인 흑인을 차별하고 착취하며 경제적인 부에 집착하는 무례한 인종으로 매도했다. 이에 사회학자인 데릴 헌터 UCLA 교수는 ‘언론은 한인사회와 흑인사회 간에 진정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도하는 데는 무관심 했다. 그런 점에서 한 흑 갈등만을 기사화한 미디어는 한 흑 갈등을 충돌시킨 공범’이라며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인 분노의 폭발에 대한 대치물로 한인을 내세운 것에 분개했다. 이와 함께 한인 사회에 무관심했던 한인 엘리트 계층의 시선도 돌아왔다. 한인 변호사와 교수, 학자들이 언론에 출연하여 이 기막힌 상황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모두 한 목소리로 공권력에 항의했다. 한인 엘리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천된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 유창한 영어로 커뮤니티를 대변하는 우리의 1.5세와 2세를 보며 또 눈물이 났다. 모든 물질적 정서적 결핍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살아온 1세 이민자의 열매가 바로 저것이구나. 우리의 땀과 힘의 결실이 저런 인재의 배출이구나 감격이 되었다. 더 열심히 아이들을 키워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이 난리통도 이제 30년 전의 추억이 되었다. 돌아보면 또 울컥울컥 분노가 일지만 그 계기로 하여 얻은 것도 있으리라 위로를 한다. 플로리다로 떠났던 K 부부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소식이다. 놀러 오라는 재촉에 응, 응, 대답만 했는데 정말 시간을 내어서 가봐야겠다. 우리는 그날 밤의 도적질을 떠올리며 얼마나 울고 웃을까. “에이, 그날 총을 갖고 갔어야 했는데. 가서 빵빵 공포탄을 쏘면 그 멕시칸들 식겁을 하고 도망 갔을낀데. 참말로 아쉽다.” 열 번도 더 들은 남편의 너스레가 그곳에서 또 나오고 우리는 한바탕 웃겠지.
<미주문학 특집 흉터 위에 핀 꽃 2021> <그린에세이 겨울호> <재미수필 2021년>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잘 서술하셌네요.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재미있는 제목이에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