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가의 집 / 김응숙
‘부산시 동래구 망미동 00번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주소이다. 수영강이 광안리 바닷가로 흘러들기 전 오른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면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들어앉은 동네였다.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팔도시장과 5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큰길을 건너면 광안리의 푸른 바다로 이어졌다.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갈대가 우거진 수영강둑이 길게 누워있었고, 그 너머로 수영비행장이 보였다. 강둑에는 저녁마다 핏빛보다 더 짙은 노을이 지곤 했다.
그 동네는 부산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겨우 전기가 들어와 있었을 뿐 신작로에서는 언제나 먼지가 풀풀 날렸다. 동네 앞 넘실거리는 보리밭 건너 저 멀리 큰 공장의 지붕이 보이고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이 보였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곳을 반촌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것은 망가지고 새로운 것은 주어지지 않은, 왠지 모르게 불온한 공기가 감도는 동네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온 부유물 같은 사람들이 가난이 얼룩진 그 동네에 발을 붙이고 살았다. 아버지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삿짐 귀퉁이에 들어있는 족보가 아버지의 혈통을 보증했으나 사실은 바늘 꽂을 땅 한 뼘도 없이 몰락한 집안의 장손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신문이 들려 있었지만, 실상은 세상과 겉도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런 아버지가 병든 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거느리고 이 동네의 허술한 단칸방으로 스며들었다.
과연 사람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누구는 가족의 휴식처라고 하고 누구는 재생산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이라고 한다. 요즘은 재테크의 수단이고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집은 늘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서 어쩔 수 없는 가족들과 살아야만 하는 곳이었다. 비록 그곳이 벼랑 위에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더라도 말이다.
대문도 없는 대문 기둥 사이를 지나면 오전에는 슬레이트 지붕이 그늘지고 오후에는 엉성한 블록 담벼락이 그림자를 남기는 초라한 마당이었다. 그 마당가에 차마 집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한 방 하나, 부엌 하나에 좁은 마루와 현관을 가진 집들이 나지막한 처마를 맞대고 있었다. 그 집들은 더 밀려나지 않으려고 낮은 자세를 하고 어깨를 건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집마저도 툭하면 월세가 밀려 독촉을 받는 형편이었으니 사실 물러날 곳이 없기도 했다.
알고 보면 입 하나를 덜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할 동안 네 번의 전학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있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렸지만 이미 가난으로 마음에 금이 가버린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늘 어쩔 수 없이 그 초라한 마당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날개에 상처를 입은 어린 새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제 상처를 핥아댔다.
옆집에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연자언니가 살았다. 언니의 아버지는 상투를 틀고 수염을 기른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다. 아버지는 그분을 ‘진사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진사 어르신은 아침이면 방문을 열고 시조 한 수를 읊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가느다란 붓으로 필사를 했다. 판자로 만든 책장에는 한지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나일론 끈으로 엮은 필사본 책들이 가득했다.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대던 연자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더니 배가 잔뜩 불러서 돌아왔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가짜 대학생에게 속았다고 했다. 한동안 진사 어르신의 집은 방문도 열리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연자언니가 다시 떠나고, 아기도 남자의 누나에게로 보내진 뒤 진사 어르신의 방문은 다시 열렸지만 더는 시조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세상이 좌우로 헤쳐 모아를 할 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다. 박식했지만 실천할 수 없었고, 인격을 갖추었지만 실속이 없었다. 그저 세파에 밀려 세상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진사 어르신은 ‘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신문을 든 김 선생님과 탕건을 쓴 진사 어르신이 마당에서 만날라치면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진짜 선생도, 진사도 아니면서 마당가의 집에 살았던 그 두 남자는 상대를 꼬박꼬박 그렇게 불렀다. 시대적 가치의 벼랑 끝에서 속절없이 부서져 내리는 서로를 목도하면서도 끝끝내 그 호칭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와 연자언니의 어머니는 마당가의 집답게 서로 어깨를 걸고 살았다. 우리 집 쌀독이 바닥나면 나는 바가지를 들고 연자언니네 집으로 갔다. 연자언니네 연탄이 떨어지면 나는 우리 연탄을 들고 연자언니네 부엌으로 갔다. 동생이 열이 펄펄 나면 연자언니 어머니는 책장 구석에서 붉은 가루를 꺼내 숟가락에 묽게 타서 입에 넣어 주었다. 연자언니 아기가 집을 떠날 때 어머니와 연자언니 어머니는 부엌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깊은 밤 변소에 가기 위해 마당을 가로지르다 뒤를 돌아다볼 때면 불 꺼진 집들이 마치 무거운 바위처럼 마당가에 가라앉아 있었다. 마당도 그 집들을 얹은 채 겨우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마당가의 집들은 어쩌면 그곳에 살았던 우리에게는 정말 세상의 벼랑 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쌓이면 심연이 된다. 나는 그 마당가의 집을 떠올리면 심연 깊이 잠수한 것처럼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곳으로 자꾸만 돌아가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눈물처럼 어른거리는 시간의 물결 아래로 그 시절의 그 얼굴들이 그대로 보인다. 내가 아프고도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그 마당가의 집은 아직도 나의 집인 것이다.
<에세이스트 2021년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