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경자년 쥐의 해가 저물고 신축년 소의 해를 앞두고 있다. 소라고 하니 불쑥 정지용의 ‘얼룩백이 황소’가 떠오른다. 국민적 애송시인 『향수』 전 5연은 여름, 겨울,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어 봄이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3연을 늦봄이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름에 가깝다. 사계절 순서대로 노래한 후 마지막 5연에서는 백석의 시처럼 온 가족이 등장하는 명절 풍속을 넣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런 걸 따질 게재도 없이 그저 슬슬 외우고 싶은 명시다. 그렇게들 애송하면서도 정작 아직도 그 의미를 몰라 알쏭달쏭한 시어들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금빛 게으른 울음’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1연(정지용문학관 홈페이지)
다른 어휘는 다 밝혀졌으나 ‘금빛 게으른 울음’은 여전히 애매하여 그 정확한 개념이 잡힐 듯 말 듯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리기에 아삼아삼해진다. 이 시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매력적인 이 술어를 이해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 저 농한기인 한여름 농촌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웬만한 가뭄이 아니면 실개천의 물이 지줄대는 여름은 농촌에서 가장 목가적인 풍경인 소를 방목하는 계절이다. 방목이랬자 야생초가 풍성한 들판이나 산기슭에다 소를 반나절도 못 되게 풀어 놓고 마음대로 풀을 뜯게 하는 일종의 뷔페식인데, 이를 ‘소먹이기’라고 불렀다. 통상 농민들에겐 ‘어정칠월 둥둥 팔월’에 해당되는 기간이라 소들도 한가해져 몇몇 허드렛일은 한낮 더위가 오기 전에 해치우도록 조처한다. 소의 점심은 전날 베어 둔 풀로 때우는 간이식이다. 오찬 뒤 소는 마구간이나 나무 그늘 아래서 되새김질로 “엷은 졸음에 겨워” 편안하게 빈둥거린다.
여름철 소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가든파티다. 대개 소 먹이러 가는 시간은 오후 서너 시경 태양의 맹위가 한풀 꺾인 뒤이다. 소가 더위를 먹으면 조당수가 즉효인데 식량이 귀한 판에 좁쌀도 아까운 데다 한더위에 조 죽을 끓이는 것 또한 아이들 몫이라 세심하게 소의 건강을 돌보게 된다. 방목지에는 대개 밭이 없기에 학동들은 소 이까리를 목이나 뿔에다 감아 멋대로 다닐 수 있도록 조처하고는 ‘풀 먹어!’ 하고 명령을 내린 후 초동들은 자기들 놀이에 빠진다.
여름 해는 길다.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면 소들도 북처럼 탱탱해진 만복한 상태에서 나무 그늘을 찾아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조는 듯 되새김질을 한다. 소는 사람보다 정직하여 배가 부르면 욕심이 없어져 한유를 즐기는데 그때의 표정은 고즈넉한 안분지족(安分知足)으로 바로 정지용이 ‘해설피’라고 지목한 시간과 일치한다. 해설피에는 하던 싸움도 그만두고 싶을 만큼 만물을 차분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해설피는 잠시 휴식철 겸, 명상처럼, 평화처럼 발걸음을 죽인 채 조용히 다가온다.
암소들은 배부르면 얌전해지는데 황소는 다르다. 특히 가임기의 암소가 암내라도 풍기면 황소들끼리의 싸움이 치열해진다. 머슴애들이 그걸 빨리 눈치 챌 수 있는 건 암소의 국부에서 분비물이 흘러내리며 비릿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황소 싸움을 붙여 즐길 때도 있지만 대개는 곧바로 한 녀석을 몰고 다른 곳으로 가도록 조처한다. 우리 눈으로 씨받이 감으로 어느 녀석이 적합한지를 즉결 심판해서 그놈을 짝으로 지어 주고자 탈락자를 딴 곳으로 강제 연행해 버리는 것이다. 엄연한 우권(牛權)과 연애의 자유권에다 황소들의 활동권을 침탈한 조처였지만 예사로 그랬다. 이상하게도 암소는 전혀 마음에 드는 아비를 선택할 의지가 없이 누구라도 받아 줄 수동적인 자세다. 오랫동안 한동네에 살며 충분히 선을 볼 기회가 있었건만 어느 쪽이 퇴출당하든 전혀 관심이 없다.
암소 임자가 코뚜레를 바짝 조여 잡고는 황소와의 교미를 성사시켜주는 동안 다른 우동들은 낄낄거리며 요상한 표정으로 열심히 관찰한다. 이상한 건 분명히 암내를 미리 풍기며 다소곳이 신랑을 유혹한 건 분명 암소였건만, 황소가 뒷등에 기어오르려고 하면 꼭 뒷걸음질로 몸을 빼며 사리다가 마지못한 척 응해 준다. 암컷의 마음이라니 알다가도 모르겠으나 아마 황소의 욕망을 더 부추기려는 교태일 것이다. 교미 직전의 황소가 암소의 엉덩이 냄새를 맡으며 웃는 표정은 일품으로 아마 동물들의 전희 중 가장 품격 있는 수컷다운 행위가 아닐까 싶다. 이걸 보면 웃음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닐시 분명하다.
인간과는 달리 암내 풍기는 상대가 없으면 황소들은 거의 성욕을 발동하지 않는 듯했다. 가끔씩 눈을 힐끔거리다가 몇몇 암소에게 돌아가며 수작을 걸어 강제로 등 뒤에 올라타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암소가 날쌔게 몸을 피하거나 설사 못 피하더라도 긴 꼬리로 음부를 병마개처럼 꽉 막아 버려 어떤 힘센 황소도 어쩔 수 없어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소들의 세계야말로 성폭행이 불가능한 것 같다. 무척 윤리적이라 성범죄 따위가 없는 평화로운 암수의 성 윤리 준칙이었다.
암내 풍기는 유혹자가 없을 경우에 황소들은 무척 온순하다. 황소란 곧 수소이기에 정겨움의 ‘얼룩빼기 황소’란 바로 이런 속성을 지닌 수소를 지칭한다. 그들은 이제 적당히 배가 부르고 쾌청한 날씨에 해설피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 무척 흐뭇하다. 사람이라면 시를 읊거나 노래를 한 곡 뽑을 법도 하다. 이럴 때 얼룩빼기 황소가 우는 ‘으으음무우우우’ 하는 게 바로 ‘금빛 게으른 울음’이 된다. 혹 그 황소도 정지용 시인처럼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어머니나 함께 놀던 벗들을 떠올리거나, 혹 언제 만나게 될지 기약 없는 미지의 애인(암내 풍길 암소)을 그리워하는 세레나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간절함이자 애절함, 원통과 비참, 이악스럽거나 생떼 쓰기, 혹은 분노나 원망의 탁한 감정이 강하게 묻어나지 않는다. 바로 낙이불음(樂而不淫)의 경지로 여유로운 농지거리 같은, 울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조창 같다.
아, 저 평화로운 흡족한 상태에 처한 황소의 유유자적! 이런 순간에만 들을 수 있는 게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 천하태평의 경지다.
그 울음은 곧 한국 농촌이 오순도순 다정했던 품앗이로 함께 살던 시절, 따지자면 농민들이 언젠들 고생이 없었으랴만 그래도 등 따시고 배부를 수 있었던 풍경을 상징한다. 지용이 그런 울음을 그리워한 건 일제의 수탈로 태평스럽지 못한 고향을 그리워해서이리라.
그 태평연월의 상징인 금빛 게으른 황소의 울음이 남북 삼천리에 퍼질 날은 언제려나. 그런 경지는 소만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도 따라 할 만한 열락이 아닌가. 아마 정지용 시인도 나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이 시인에게 향수란 자기의 땅에서 사라져 가는 주체성을 그리워하는 민족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