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지배를 벗어나 / 조지현

 

“14.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바가바드 기타》, p.22)

 

《바가바드 기타》를 필사하다 보면, 꼭 어느 한 구절이 손끝에서 탁 하고 감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시선이 잘 닿는 곳에 그 구절을 적어 붙여두고 그 단어들이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질 때까지 읽곤 한다.

인간은 감각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인간이 감관을 통한 인식과 그것들의 통제를 “벗어나” 어떠한 사물이나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보고 들리는 것 그것을 실재로 판단하고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관이란 감각을 차지하는 기관으로 오감 혹은 오관이라고 하며, 이것들의 작용으로 반응과 감정이 생겨난다.

인간이 스스로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인지하는 가장 일차원적인 척도가 바로 이 오관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관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곧 나 자신이며, 차가움 또는 뜨거움을 느끼는 내가 곧 나의 본질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 반응 역시 자아라고 생각한다. 기쁜 내가 나이며, 슬픈 내가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지배하는 뇌는 오감의 본능적인 지배를 받으며, 그것이 철저히 나 자신이라고 인식하도록 설계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감각의 인지와 반응을 결정하는 뇌신경(Cranial Nerve)은 인체에서 가장 직접적이고도 섬세하게 뇌와 직결돼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생명활동의 기초이며 생명유지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감각기관은 곧 확장된 뇌(Extended Brain)라 봐도 무방한 것이다.

이 오관을 통해서 인간의 뇌는 위험을 직관하고,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작용, 반응을 통해 신체를 물리적으로 보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멀리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는 맹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필요한 순간 먼저 창을 들어 상대를 찌르도록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키며, 혀끝에 독초가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뱉어 죽지 않도록 반응해야 했다. 그것이 곧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이 생존을 기반으로 우리는 나아가 사랑하는 이성을 선택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종족을 이어왔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감각을 느끼면 이에 대해 반응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감각의 치밀성이 우리를 살아 있게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감각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인간에게, 자아와 오관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해 인도의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였다.

“서로 대립되는 감각은 모두 유한하고 일시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나 브라만에서 오는 즐거움은 보편적이며, 자존하여서 모든 특수한 원인이나 대상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다. 불가분체가 있어서 이기적인 존재의 기쁨과 슬픔의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붙들어 준다.”

(《바가바드 기타》, p.22-23)

 

즉, 감각은 모두 유한하고 일시적이며, 깊은 우주의 원리(진리)를 깨닫는 상태에 이르러 얻는 자존적인 즐거움은, 오고 가는 특수한 원인과 대상에서 인간을 독립시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감각의 원인과 대상에서 독립된 상태는 무엇일까?

라다크리슈난의 말 중에서 내가 특히 깊은 감명을 받은 부분은 이 부분이다.

 

“그 쾌락, 고통의 태도는 습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반드시 기뻐해야 하고 실패를 반드시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없다.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꼭 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다. 기쁨, 슬픔을 당하는 것은 사아 곧 의식 때문에 그것이 생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거기 붙어서 지식과 행동을 하고 있는 이상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에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은 오고 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다음이 어떤 것이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바가바드 기타》, p.23)

 

감각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인간에 대한 놀랍고도 신비한 설명이다. 쾌락이나 고통의 태도가 결국 습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말은 놀라운 힘을 지녔다. 쾌락이나 고통의 태도는, 감정에 반응하는 인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이 습관이라는 말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습관은 운명이며, 습관은 매일매일의 의식이며, 습관이 곧 다르마(Dharma)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슬픔이 일어나는 감정의 감각은 결국 사아, 곧 습관과 몸에 달려 있는 의식일 뿐, 마음을 분리하여 자유함을 얻고 의식의 높은 차원에 닿으면 오관에 반응해 일어나는 감정을 뛰어넘는 상태에 다다른다는 설명은 여러 가지 단계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함을 준다.

먼저 감각을 지각하고 인식하여 이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감정은 몸에 달려 반응해온 습관적인 의식일 뿐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감정이 곧 나 자신이라는 거짓 인식에 빠져있다. 슬픈 나, 또는 기쁜 나를 나 자신으로 인식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금방 깨달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반응을 나 자신의 의식과 분리하는 것은 고도로 어려운 일이다. 일상을 돌아보더라도, 우리가 일희일비할 일들이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치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정점을 찍던 희열이 열등감이나 자괴감 또는 자의식, 곧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돌고 돈다.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에 대한 정보가 손안 스마트폰을 통해 전달되고, 그것이 비교의식이나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데까지 수초도 걸리지 않는다. 거의 본능과 직결되어 있는 감정 반응이, 분 초 단위로 현대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이것이 불안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업으로 삼고 있는 직업의 세계는 또한 어떠한가? 성과라는 미명하에 엄청나게 많은 지식과 생각이 소모되고 있는 가운데, 소모적 감정을 느끼는 의식이 자신의 존재가치와 대등하다고 느끼며, 거대한 숫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소모적 부품으로 여겨 자의식에 빠져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미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철학자는 그 모든 것들이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없다 표현했다. 이것은 허무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인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지배를 당하는 것은 우리의 사아, 곧 사사로운 것에 편입된 자아라고 말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私)’는 벼 화()에 둥글게 에워싸다는 의미를 지닌 ‘사()’ 자가 합쳐진 형성문자로, 수확할 때 자기가 몫으로 한 것, 나의 것, 몰래의 것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다. 자기가 선택하여 자기 몫으로 몰래 가져온 것, 곧 욕심에서 비롯된 부가적인 어떤 몫을 선택하여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인 것으로 해석해보았다. 그것이 삶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지식(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의 노예로 끌려 다니며 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근본적인 실재를 아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결국 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 자신의 실재를 아는 것이다. 나는 오고 가는 덧없는 감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자아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이다. 나인 것, 진정으로 나 자신인 것은 바로 우주적인 나,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나, 실재의 원리를 깨달은 나, 그리하여 오고 가는 덧없는 것을 뛰어 넘은 나, 매일의 습관을 통해 쾌락과 고통의 태도를 선택하는 나, 그것이 진짜 나인 것이다. 나의 본질, 나를 구성하는 질료, 나의 자아를 온전히 간파하고 그것이 우주의 실존적인 원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감각으로부터 파생되어 우리를 쾌락으로 이끌거나 고통으로 이르게 하는 감정을 뛰어넘을 수 있다.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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