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과 불완전의 등식 / 김성진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코끝이 요란하다. 눈을 뜨자 창틈 사이로 낯익은 향이 공략해 온다. 창문을 열어볼까도 싶었지만, 기대감을 더 느끼기 위해 뜸을 들여본다. 문득 짚이는 게 있어 얼른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본다. 화단의 치자나무에 어제 없던 꽃이 활짝 폈다. 자는 동안 방 안에 스며들어 머리맡을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정갈한 그 향이 가슴에 스멀스멀 스며든다.

치자는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잘록한 그 모양이 마치 복주머니를 닮았다. 노랗게 익으면 말려두었다가 옷감 염색으로 쓰기도 하고 튀김이나 부침개 등 음식의 색깔을 내는 데도 쓴다. 열매와 더불어 뿌리는 약재로 쓰기도 한다. 꽃의 향과 함께 사철 푸른 잎 때문에 최고의 정원수로 꼽는다. 그처럼 치자나무는 어느 한 곳 버릴 것이 없다.

향을 풍기던 꽃이 시들고 있던 어느 늦여름 날, 정원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늘 푸름을 자랑하던 치자 잎이 절반이나 사라지고 없다. 그 많던 잎을 누가 다 없애버렸단 말인가. 찬찬히 살펴보는데 무언가 못 보던 것이 눈에 띈다. 새끼손가락만 한 연두색 애벌레다. 잎을 갉아 먹고 있는 이놈의 정체는 이름도 어리둥절한 ‘줄녹색박각시’라는 나방의 애벌레다.

호기심에 살짝 건드려본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머리 전체가 눈이라 할 만큼 큰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두꺼운 치자 잎을 흔적도 없이 갉아먹는다. 떼어보려고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줄기를 움켜잡은 배다리의 힘이 장난 아니다. 몸을 만지자 입에서 진액을 토해낸다. 초록을 먹었으니 액과 몸도 초록이다. 나뭇잎과 벌레가 비슷한 색이라 자세히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세 그루 치자나무에 스무 마리는 넘게 붙어 있다. 그야말로 주렁주렁 열렸다. 가장 작은 두 마리만 남기고 모두 떼어냈다. 잎이 절반쯤 없어도 나무가 죽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징그럽다며 도망간다. 뭐가 징그럽다는 건지, 난 귀엽기만 하다. 내일 아침 남겨둔 두 마리와 다시 인사해볼 요량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땅으로 들어가면 더 볼 수 없으니 실컷 봐둬야겠다.

줄녹색박각시는 나방의 일종이다. 나방은 알에서 나와 애벌레 때 열심히 먹이활동한 후 우화(羽化)를 위해 땅속으로 들어간다. 애벌레였다가 번데기를 거쳐 나방이 된다. 이렇게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것을 ‘완전 탈바꿈’이라고 한다. 나방이나 나비, 벌 등이 완전탈바꿈을 한다. 그와 달리 매미의 애벌레는 땅속에서 번데기 과정 없이 몇 번의 허물을 벗은 후 성충 매미가 된다. 매미처럼 번데기 과정 없이 탈바꿈하는 것을 ‘불완전 탈바꿈’이라고 한다. 매미를 비롯해 메뚜기, 바퀴벌레, 노린재가 불완전 탈바꿈을 한다.

모든 곤충은 완전이든 불완전이든 탈바꿈을 통해 성충으로 성장한다. 번데기 과정의 유무에 따라 완전 또는 불완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성충으로 자랄 확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임의로 이름 지었을 뿐이지 더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지는 않다.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 앞에 나약해지는 재벌이나 지식인들을 볼 때 경제적 여유나 지식의 깊이가 완전한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느낀다. 그렇다고 권력이 영원한 것을 본 적도 없다.

곤충이든 인간이든 완전과 불완전의 기준은 무엇일까. 생물 중에 가장 완전에 근접한 생명이 있다면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우주와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곤충이나 인간이나 지극히 미미한 존재다. 우리는 이 작은 차이를 완전과 불완전으로 오해한다. 시각적인 작은 차이를 완전함의 정도로 판단한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면 신체의 좌우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의 얼굴이 인형처럼 똑같아야 하며, 생각의 깊이나 넓이도 똑같아야 한다. 하지만 수십억의 인구 중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비슷하게 닮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모든 생명체에 완벽한 완성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끝없이 완전을 위해 나아갈 뿐이다.

돈을 벌겠다는 사람, 권력을 갖겠다는 사람, 그림을 그리겠다는 사람, 글을 쓰겠다는 사람 등 자신이 가는 길을 가는 사람치곤 현재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설령 현재에 만족해도 이내 좀 더 나은 무엇을 위해 정진한다. 오늘 할 일을 다 하였어도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을 가지고 그 불완전을 채우기 위해 내일을 계획한다. 끝도 없는 자기완성에 힘쓰는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경우라도 현재는 완전하지 못하다. 그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을 꿈꾼다.

정신과 육체가 완전하기 위해서 움직임(動)이 존재한다. 미완성의 존재로서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내일이 나아지려는 본능이 있는 것이다. 멈춤(靜)은 죽음이 아니라 해탈하여 초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라면 종교에서나 이룰 일인지 모른다. 완전한 완성이란 어쩌면 멈춤(靜)을 뜻한다. 그 말은 완전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일 용기’만 있다면 그 부족함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실수할 수도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요구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실패가 두렵지 않을 수는 없다. 실패가 두려워도 숨지 말고, 용기 내어 한 발이라도 내디딘다면, 삶의 만족도는 어제보다 한걸음 나아진다. 그런 용기를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 싶다.

예술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완전해지기 위해 또 다른 불완전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세상엔 움직여(動) 후회하는 일보다 멈추어(靜) 후회하는 일이 더 많다. 새로운 불완전의 길을 가다 보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으로 새로운 인생을 느끼는 일이다. 예술이란 새로움에 대해 끝없이 천착하고, 더 나은 곳으로 순례하는 일이다. 예술을 세상과 떼어 생각할 수 없기에 조금은 거칠고 외로워도 자신을 몰아세운다. 완전과 불완전의 등식은 제로라는 것을 알지만.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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