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에 개운죽竹을 기르고 있다. 물만 먹고도 싱싱한 잎과 줄기를 내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지 않다. 줄기 하나를 집어 들면 나머지 줄기들도 따라 나선다. 서로의 뿌리 속에 뿌리를 내린 채 단단히 엉겨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묵은 뿌리 위에서 하얀 어린 뿌리들이 걸음마를 익히고 있고, 중간에 가부좌를 튼 뿌리들은 어느 쪽으로 줄기를 낼 것인지 긴 생각에 잠겨있다. 어린 뿌리에 자꾸 마음이 간다. 수필을 쓰면서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 주저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다.
수필을 읽으면 사람이 사람답다는 게 어떤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사람이 그리워 시골 오일장이 서듯 수필 또한 사람이 그리워 생겨난 문학이 아닐까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일 한 잔의 막걸리가 되기 위해, 추운 곳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건넬 한 벌의 내복이 되기 위해 수필은 태어난 것 같다.
수필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일은 좋은 수필과의 만남이었다. 읽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 언저리가 뜨뜻해져 오는 수필, 아랫배로부터 둔중한 통증을 끄집어내는 수필, 세상이 환해 보이도록 만드는 수필 등, 그런 수필로부터 수필의 걸음마를 익혔지만 아직도 나의 수필은 혼자 걷는 게 힘들다.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면서 가고 있다.
나는 가능한 한 나의 수필이 시골버스를 닮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모른 척하거나, 우리를 외진 곳에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러나 시골버스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정류장이다. 앞을 보고 달리다가도 지나쳐온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후진하는 차, 사람만 타는 게 아니라 강아지와 돼지새끼, 그리고 곡식 자루와 푸성귀도 한 자리 차지한 채 오질장 구경에 나서는 차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하며 풀숲으로 잠복한 할머니가 다시 허리춤을 올리며 느릿느릿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차, 그러면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늙어가는 차다.
둠벙 한가운데에 돌멩이를 던져서 물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물을 보내어 물살을 일으키는 언어가 시어詩語라고 한다. 수필의 언어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천천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자라는 논배미의 이런 모습들, 그 어린 모들을 데리고 굽이굽이 길을 가는 논두렁처럼 수필도 그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그 때 생기는 한 줄기 곡선이 세상과 우리를 부드럽게 이어줄 것이리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작가란 수도승이나 마찬가지라고. 영감靈感이란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고 했다. 황태의 담백하고 시원한 맛도 얼었다 녹았다를 스무 차례 반복하는 데서 오는 것처럼, 문학의 깊은 맛도 그렇게 오는 모양이다.
인생이란 자동점멸등과도 같은 것, 기다렸다는 듯 반짝 불이 들어왔다가도 몇 발자국 옮기는 사이에 이내 불빛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간도 그 자동점멸등이 꺼지기 전까지다. 시골버스처럼 천천히 가고 싶은 나의 수필과 자동점멸등 같은 삶의 유한성, 그것이 내 글쓰기의 아이러니다.
너무 우울해 하지는 말자. 그 한정된 시간에 가장 인간적인 문학, 수필을 만나 삶의 냉기를 얼마쯤 피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