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흔들린다.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어찌나 애절하게 우는지 허공은 울음바다가 된다. 푸른 알이 담긴 둥지 속에 애잔한 눈빛을 담근 채 종일토록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저며 온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미안해서, 그리워서 운다는 저 울음소리에 숨이 막힐 것 같다.
뻐꾸기가 불안한 눈빛으로 오목눈이 둥지 주위를 맴돈다. 알을 낳고도 품어주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깨어나라고, 살아남아야 한다며 뻐꾹뻐꾹 목이 터져라 외친다. 나무는 바람과 땅의 소리를 듣고서야 잎을 피운다. 오목눈이 둥지 속 푸른 알은 제 어미인 뻐꾸기의 피 끓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어미의 마음은 다를 바 없다. 아기를 낳기는 했지만 키울 수 없는 그 심정을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배냇물도 마르기 전에 화장실이나 스레기통에 슬며시 던져두는 비정한 모정도 있다. 사정이야 어떻든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게 아니냐고 비난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을 듣고 보면 탓할 수만도 없다.
열아홉 살 어느 미혼모는 임신한 지 다섯 달이 될 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아기 아빠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가족들에게 말 할 수도 없었다. 출산 직전까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병원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품에 안아보니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여린 숨결이 느껴졌다. 겨우 눈을 뜨고 어미를 올려보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차라리 안아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테다. 아기의 심장 소리가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성악설로만 가득 차 있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성선설로만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나무란다. 그렇다고 키울 형편도 아니다. 잘 키워줄 부모가 있다면 차라리 위탁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베이비박스를 보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상황도 모르고 쌔근거리며 자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눈, 코, 입을 만지면서 ‘아가야, 미안하다.’라고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생아 때는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상식조차 모르면서 배냇짓을 하며 웃는 아기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얼굴을 돌려버렸다. 어미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듯 배이비박스의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아기 한 명을 눕힐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다. 그 앞에는 ‘불가피하게 키울 수 없는 장애로 태어난 아이와 미혼모의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해마다 버려지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주기 위해서 어느 교회 단체에서 베이비박스를 설치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들어온 아기들은 그곳에서 며칠 보호를 받는다. 간혹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보육 시설에 보내진다. 베이비박스를 두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측과 오히려 아기를 유기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혼자 아기를 키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인 지원이나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냉대를 견디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미혼모들이기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을 어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 심정을 헤아리다 보니 문득 어릴 때 보았던 숙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숙모가 사촌 동생을 우리 집에 맡기려 왔다. 앞길이 창창하던 젊은 숙모는 작약 꽃이 피면 데리러 오마 약속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은 언니들 틈에서 잘 놀았다. 밤낮으로 울음소리에 식구들은 둥둥 떠다닐 줄 알았다. 기우였다. 따뜻한 둥지에 들어앉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이 들었다. 숙모는 대문 밖 담장에 기대어 서서 밤새 울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넓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눈이 쌓였다가 녹았다. 작역 꽃은 피어 꽃밭을 이루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종일토록 뻐꾸기 소리만 꽃밭으로 내려앉았다.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도 품에 안고 키우지 못하는 어미의 찢어지는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천륜을 끊어가면서까지 새끼를 버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고 보면 비정한 무정이라 탓할 수만 있을까. 새끼를 낳고 키우는 건 어미의 책임이라지만 낳아서 버린다고, 남의 손에 맡긴다고 어미의 본성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다시 본다. 탁란하는 조류나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돌아가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간혹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뻐꾸기 같다고 하던가. 뻐꾸기를 두고 뻔뻔한 모성애라고 하던가. 뻐꾸기 소리는 세상 모든 어미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어미는 어니의 소리를 저절로 알아듣게 된다. 그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다만 깊게 바라보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지 않던가. 넓고도 복잡한 세상이란 숲에서 스스로 술래가 된 어미들은 새끼를 지척에 두고도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단단한 슬픔을 안고 뻐꾸기가 애절한 목소리로 묻는다.
누군가 그리워서 울어본 적 있는가
보고 싶다고 당당하게 목 놓아 본 적 있는가
목이 터지도록 애태운 적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