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수선한 축제처럼 지나가고 나는 지금 마딘 여름 속에 있다.
길고 긴 하루하루가 만년 같았던 오십년 전, 우리 집 마당에는 여름꽃이 앞 다투어 피었다. 키 큰 해바라기와 칸나는 북쪽 벽을 면해 있고 그 앞에 달리아며 백일홍, 장미, 맨드라미가 잇달아 피어났고 맨 앞줄엔 봉선화, 채송화, 분꽃이 앙증맞게 피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름꽃의 함성이 들릴 것만 같다.
책을 읽다가 복도로 나와 창문을 열면 아버지가 화단에서 흙일을 하고 계셨다. 모종삽을 들고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은 뒷모습, 수척한 어깨 위로 그분의 흥얼거림이 지나갔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방학 날이면 아버지는 서재에서 우리를 기다리셨다. 한 사람씩 불러 세우고 성적표를 받아 평균점수를 일일이 주판으로 확인했다. 꾸중도 없는 긴 침묵의 시간이 사람을 더욱 긴장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입에선 침이 마르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동안 눈은 갈색나무 벽걸이에 꽂힌 글라디오라스에 가 머물렀다. 사뿐히 계단을 밟아 오른 소녀처럼 꽃은 층층이 붉게 피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독 그 화병을 좋아하셨고 거기에 글라디오라스를 즐겨 꽂으셨는데 때론 그 임무가 내게 부과되기도 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서재, 어둑해진 공간, 그 적막속에 혼자 앉아 있기를 좋아하던 어린 내 기억 속엔 글라디오라스가 심상 이미지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의 평화를 담보하던 그 꽃과 아버지의 서재 그리고 시름없던 나의 어린 날을 기리며 그후 나는 보드레르의 시 일구 "곧 우리는 싸늘한 어둠 속에 잠기리. 너무나도 짧은 우리들의 여름, 발랄한 광명이여!"를 얼마나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가.
캥거루처럼 당신 품속에 넣은 우리들과 책과 화초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그분은 타의 반 자의 반 공직에서 물러난 뒤, 집을 줄이느라고 책부터 없앴다. 수복 후 고서점에서 건져낸 책들을 수선하고 매만진 장서 오천 원 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책이 보이지 않았다. 책이 없어 진 것만 알았지 책을 잃은 분의 심정 따위는 헤아리지 못했다. 화불단독이라더니 얼마 뒤 우리는 생떼 같은 남동생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아버지의 탄식과 어머니의 실성, 영락한 세월이 얼마 지난 뒤에 한직이나마 주어져 우리는 이 관사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영일寧日, 그러나 살얼음을 디딘 듯 불안한 평온이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 집에서 동생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퇴근해 돌아오니 어머니가 빈집에서 혼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왕진 온 의사는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혹시나 자살은 아닐까? 그 벙어리 냉가슴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세상은 변한 게 없는데 이것이 이별이래.'라던 노랫말이 먹먹한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숨이 멎을 듯한 무더위 속, 7월 24일이었다. 백주白晝의 정적, 머릿속은 온통 하얗기만 했고 귀는 멍멍 했다. 전화로 부고를 알리려고 마당으로 나왔을 때, 내 눈과 딱 마주친 것은 칸나였다. 입안에 잔뜩 핏덩이를 머금은 것 같은 칸나는 마치 늙은 집시여자처럼 '데스'라고 쓴 카드를 들어 보이며 내게 죽음을 통고하는 듯했다. 엄연한 사실을 수긍하라는 듯, 잠시 내가 선 지축이 흔들렸다.
왕성한 모든 생명활동의 극점인 여름이, 내게는 그때부터 죽음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마음안자락에 깊숙이 스며들던 죽음의 그림자들을 나는 기억한다 6.25 피란 중에 내다버린 여동생의 시신, 뇌염으로 죽은 남동생, 어머니의 죽음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대부분도 여름에 죽었다. 죽음에 관한 기억들이 유독 여름의 끝자락에 맞닿아서인지 여름은 언제나 나를 시간 저편(죽음)에 서게 한다.
헤밍웨이가 방아쇠를 당겨 캐첨 산자락을 뒤흔든 것은 7월 2일 새벽이었다.
'영광스럽게가 아니면 결코 파리로 돌아오지 않겠다.'던 보들레르가 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실어증에 걸려 파리로 돌아온 것도 7월 2일이었다. 그가 입원했던 돔가의 정신병원 앞에서 어느 이른 아침 나는 조바심을 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곳 왼편 표지판에 '1867년 8월 31일, 46세의 나이로 보들레르가 이곳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죽었다.'고 쓰여 있고 쇠창살이 촘촘한 일층 창가엔 붉은 넝쿨장미가 그걸 덮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알수 없는 탄성이 앗! 하고 지나갔다. 장미에 덮인 쇠창살, 나는 그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일곱 살 때인가, 영문도 모르는 한 컷의 장면. 타인처럼 쇠창살 안에 어머니가 있었다. 잊었던 기억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라왔다.
정신병원에서 숨진 보들레르, 모파상 그리고 슈만도 여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들도 모두 40대였다. 1856년 7월 29일, 무더운 여름날 오후 4시.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들어 온지 2년, 슈만은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 어머니처럼 임종의 순간에 곁에 아무도 없었다. 30분가량 지나서 그의 아내 클라라가 달려왔을 뿐. 1893년 7월 6일, 블랑슈 박사의 병원에서 숨을 거둔 모파상도 혼자였다. 오베르의 푸른 보리밭 앞에서 총성 일발이 울린 것은 7월 29일, 고흐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동생이 온 뒤 새벽 한시가 조금 지나서 눈을 감았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왠지 그의 말이 가슴속을 맴돈다. 어느 날은 그걸 소리 내어 따라해 본다.
'ㅇㅇ,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 '지금'을 언제로 할까? 상상속의 장면을 떠올리며 그것이 현실이 된데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다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음독자살은 7월 24일. 마침 우리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내러 남동생의 집을 찾아 가던 날, 등 뒤로 쏟아지던 따가운 햇살, 숨이 턱턱 막히는 언덕길에서 나도 도쿄 다바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짜릿한 통증이 지나갔다.
작가로서 그는 솔직하지 못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면서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로 시작하는 『죽은 자의 명부』에서 친가의 감옥 같은 2층 방에 갇혀있던 어머니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큰딸을 잃고 막내로 아들을 낳았지만 액년에 태어난 자식을 '버린 자식'으로 만들어 거리에 내다버린 슬픔, 갑작스런 친정오빠의 죽음. 사업가인 남편의 방탕, 산후 우울증과 마음의 병이 겹친 결과였다. 그녀가 죽은 나이는 43세 내 어머니의 나이는 48세였다. 내상內像도 비슷했다. 6.25때 단 하나뿐인 피붙이 남동생의 행방불명, 그것도 어머니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광인의 어머니를 둔 그의 무의식에 동조하면서 나는 그의 절망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내 슬픔을 치유하며 인생을 쓰다듬는 버릇을 키워 온 셈이었다. 어떠한 삶도 인간에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세 번의 자살기도 끝에 겨우 죽을 수 있었다. 가장 어리석은 형태로 자신을 멸망시키는 일만이 사회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며 심한 자학의 길로 빠져들었던,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6월 19일 생일날 아침이었다. 여름꽃을 좋아하면 여름에 죽는다더니 과연 그는 여름에 죽었다.
"죽으려고 생각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벌 받았다. 천은 삼베였다(…) 여름에 입는 거겠지. 여름까지 살자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이 요즘 내 상념을 어지럽히고 있다. 여름꽃을 좋아하는 나도 여름에 태어나서일까.
나는 한때 그에게 경도 된 적이 있었다. 칸나의 빛깔마저 전율스럽던 그해 여름, 다자이를 읽고 또 읽었다. 『사양』의 여주인공, 가즈코는 일본 전쟁의 패망 후, 귀족의 덕성을 지닌 어머니를 잃고 잇달아 남동생의 유서와 시신을 발견한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녀와 비슷한 처지로 나도 맨발로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느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지는 운명 앞에 좌절을 겪고 있을 때였다.
'여름에 입는 거겠지. 여름까지 살자고 했다'는 그의 말이 내 안에서 자꾸만 후렴구를 치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여름이다.
여름꽃이 시들어가던 그날의 폐원癈園이 떠오른다.
담벼락 앞에 가느다란 목줄기를 뽑아 올린 해바라기가 노란 동그라미로 허공에 대고 마침표를 찍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의 종언終焉을 향해서.
그 집은 우리 가족이 모여 살던 마지막 장소였다. 어린 동생들은 아버지가 계신 서모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 후 나는 혼자가 되었다. 텅 빈 여름 한낮.
그때 바람에 일렁거리던 그 노란 동그라미가 하늘을 배회하는 고단孤單한 한 영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