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문처럼, 내일은 신문지처럼 / 정성화
창가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과 신문, 그리고 향이 그윽한 원두커피 한 잔, 이것이 우리 집 ‘아침 3종 세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제 막 나온 것’이다. 오늘의 기사가 궁금한지 내가 펼치는 면마다 햇살이 저 먼저 고개를 드민다. 키가 작은 커피 잔도 계속 하얀 김을 전령으로 내보내며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다. 신문에 쏠리는 눈들이 아침을 더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신문 기사는 대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의 온도는 오르락내리락한다. 의안을 한 건도 가결하지 않은 채 회기를 넘긴 국회의원들의 세비를 생각하면 열이 나고, 내수경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는 기사에는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러다가 사회면에 들어가 누가 온정을 베푼 사연을 읽고 나면 다시 마음이 뜨듯해진다. 허투루 쓴 기사가 없다. 가끔 두 면에 걸친 전면 광고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 또한 신문사의 허리를 받쳐주는 힘이라 생각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신문은 그날이 지나가면 ‘신문지’가 된다. 이게 또 매력덩어리다. 신문이 갓 시집온 새댁 같다면 신문지는 살림꾼이 다 된 아낙과도 같다. 못 하는 게 없고 가리는 일이 없으며 궂은일일수록 두 팔을 걷어붙인다. 콩나물이나 멸치를 다듬으려고 할 때, 어쩌다가 주방 바닥에 식용유를 쏟았을 때, 중국 음식이 배달됐을 때, 소포 상자에 어정쩡하게 남은 빈 공간을 채울 때 등 그 때마다 신문지가 나선다. 가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싶을 때에도 야무지게 접힌 신문지가 들어가서 평형을 맞춘다. 신문지가 우리 집 해결사다. 구겨지고, 접히고, 잘리고, 뭉쳐지면서 제게 맡겨진 일을 잘도 해낸다.
사람의 일생도 그런 것 같다. 젊어 한때 주목받는 ‘신문’이 되지만 곧 ‘신문지’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신문’으로 살았던 때를 곱는다면 아마 첫 부임지에서 근무하던 시절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학교로 달려갔다. 초임 교사로소 꿈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즐거웠다. 동료교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조간신문’이었다. 항상 일찍 출근하는 것을 빗댄 별명이었다. 동료들에게 다소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신문’하면 성실함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별명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고는 했다. 매일 새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지, 모든 아이들에게 공정한지를.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을 때는 벗어놓을 수밖에 없다.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느 일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세 살 된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한껏 억양을 살려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자꾸만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걸레 하나를 손에 들고 와서는 거실 유리문에 붙어 서서 유리를 닦는 게 아닌가. 저를 돌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하는 양 그대로였다. 그다음에는 걸레를 뒤집어 거실 바닥도 닦고 식탁의자의 다리도 닦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에 지는 것 같았다.
교직을 그만두고 나니 한동안 공허하고 울적했다. 애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마치 전쟁을 치르는 듯 힘겨웠다. 그러나 나는 분명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었다. 가끔 ‘119대원’이 되어 시댁이나 친정으로 출동도 해 가면서 내가 그렇게 바뀐 데에는 시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참 바쁘게 사셨다. 너무나 바빠서 죽을 새가 없다고 하셨다. 당신 도움이 필요한 자식이 많다는 것을 항상 기쁘게 생각하셨다.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한 딸을 병간호하느라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숙식하신 적이 있다. 집을 팔려고 내놓은 둘째 딸 집에 가서 부동산 사무실의 연락을 기다리며 그 집 강아지와 함께 두 달간 집을 지키신 적도 있다. 노환으로 더는 거동을 못하게 된 어머님을 뵈러 갔더니 누운 상태로 당신 배위에다 소쿠리를 얹어놓고 깻잎을 차곡차곡 챙겨 실로 묶고 계셨다. 깻잎 김치를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서라고 하셨다. 손가락에 남은 마지막 힘까지 가족과 집안을 위해 다 내어주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나는 문득 신문지의 마지막 한 장을 떠올렸다.
잘 살다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죽고 난 뒤에 그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잘 산 삶이 아닐까. 그리고 신문지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이 세상에 다 내어주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삶이 아닐지. 오늘은 신문처럼, 내일은 신문지처럼 살다 가는 것은 어떨까. 매일아침 문 앞에 놓인 ‘세상’을 집어 들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