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애인 / 최정희
내가 처음 사랑한 남자의 이름은 ‘삼택’이라 불렀다. 얼굴이 희고 매끈하게 생긴 조용한 성격의 아이였다.
항상 지렁이와 뱀을 고아 먹었는데, 나는 그가 무슨 까닭으로 해서 그러한 것을 고아 먹는지 몰랐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뒤에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관계도 있었지만 삼택이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집에 갔다.
내가 가면 그는 누웠다가 일어나 앉기도 했다. 그리고 피식 웃기도 했다.
“오늘 저녁엔 박호잡일 하자.”
“점심때 아랫말에 같이 가볼까?” 하는 때도 있었다.
‘박호’는 박꽃에 찾아드는 박나비를 말함이요, ‘아랫말’은 바다가 있는 아랫마을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떤 날은 누워 있는 방을 내가 들여다보아도 아무 기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간 것을 알고 있어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멀거니 보다간 눈을 다시 스르르 감아버리곤 했다. 또 어떤 날은 지렁이 곰이나 뱀의 곰이 싫다고 먹지 않아서 아버지 어머니 속을 태우곤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박나비를 잡자고 약속한 날 저녁이면, 나는 저녁을 일찍 먹고 신바람이 나서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런 날 저녁이면, 으레 그는 더 기운이 없어서 저녁도 먹지 못하곤 했다.
“내가 붙잡아줄게 일어나봐라.”
삼택이는 내 손을 붙잡고 비틀비틀 일어나다간 픽 쓰러지곤 했다.
“앙이 되겠다. 낼 저녁에 잡자.”
이런 말을 하며, 삼택이는 자리에 누웠다.
박나비는 삼택이네 집에만 모여드는 것 같았다. 넓게 둘린 수수깡 바자에 돌아가며 박을 심어서, 박꽃은 수수깡 바자가 뵈지 않을 정도로 피어 있었다.
이 집에서 박을 많이 심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일택’이 ‘이택’이 ‘삼택’이 ‘사택’이 ‘오택’이 이에도 식구가 많았다. 여자도 반 다스 가량은 헤아릴 수 있게 있었다. 삼택이의 조모님과 어머님은 물론 형수가 둘이 있고, 또 누이동생이 둘이 있었다. 그 외에도 삼택이 조부님과 아버님이 있었다. 그러니까 식구가 도합 열다섯 명이었다.
이 열다섯 명 식구가 1년을 지내려면 바가지가 석 죽 가량 있어야 된다고 해서, 바자섶에 돌아가며 박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데보다 여기에 박꽃이 많이 필 수밖에 없었다.
삼택이와 나는 꼭 한 번 바다에 가보았다. 푸른 물결이 줄곧 출렁대는 것을 보다가 삼택이는,
“막 뛰어 들어가서 놀고 싶다. 게두 잡고, 조개도 줍구…….”
이런 말을 하며, 바닷속을 들어다보았다.
나는 이 말엔 대꾸를 하지 않고 내가 늘 생각하던 말을 삼택이에게 물어보았다.
“야, 너 바다 끝이 있겠니? 없겠니?”
물으니까 삼택이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있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하는 삼택이 얼굴엔 자신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러한 삼택이가 갑자기 보기 싫어졌다.
“틀렸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스거 아는 체하니? 바다는 끝이 없단다. 쳇바퀴 같단다. 여기서 배를 타고 자꾸자꾸 가면 다시 여기 나온단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삼택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또 그러한 삼택이가 더한층 싫어져서, 삼택이를 그냥 두고 혼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들어섰다.
그 뒤로 삼택이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삼택이에 집에서 울음소리가 벌집 터지듯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삼택이가 죽었는가봐.”
어머니한테 이 말을 하고 있는 내 가슴은 떨렸다. 하루 종일 떨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방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엔 박나비잡이를 했다. 삼택이네 바자섶에 가서 박꽃을 뚝 따들고,
“박호박호 연지박호, 이리 오믄 살고, 저리 가믄 죽는다.”
박꽃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전에 없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벌린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벌떡벌떡 삼켜가며,
“박호박호, 연지박호.”를 불렀다.
‘장다리 꽃 필 때’ ‘봉황녀(鳳凰女)’ ‘반딧불’ 같은 작품은 삼택으로 해서 슬펐던 때문에 씌어졌는지 모르겠다.
최정희(1912-1990) 소설가 ‘흉가’ ‘인맥’ ‘인간사’ 수필집 ‘젊은날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