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철학 / 베르그송( Henri Louis Bergson)

 

 

원래 사람의 외모에 있어서 기형으로 생겨 우스운 것과 보기 싫게 생겨 우스운 것은 동일한 사실적 차이,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우스운 표정이란 무엇인가? 고정적인 특징, 다시 말하면 얼굴 움직임의 습관적인 반복에서 생긴 응결체라 할 수 있다. 실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얼굴에 박혀버린 경련이라든지 찌푸린 상태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우스운 표정(심지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표정까지도)이 반드시 어떤 고정화된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아름답다든지 보기 싫다든지 하는 얼굴 표정은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만, 대개 언제라도 곧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표정들이다.

, 어느 정도의 고정성을 지녔으면서도 그 속에는 반드시 유동적인 부분이 있어 그때그때 심경의 모든 뉘앙스를 나타내게 마련인 것이다. 마치 청명하고 따가운 여름날에도 선선하고 햇빛이 부드러운 아침저녁이 있듯이, 이에 반하여 우스운 얼굴 표정은 지금 눈에 보이는 그것밖에는 별로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며, 그것은 그 사람의 특유하고 고정적인 표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표정 속에는 그 사람의 내면 생활의 전부가 결정되어 표현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우스운 얼굴에서 그 사람의 인격 전체가 맺혀 있는 것 같은 일정한 기계적인 움직임을 느낄 때 더욱 우스워지는 것의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얼굴은 늘 울상인 것 같고, 어떤 얼굴은 늘 웃고 있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또 어떤 얼굴은 밤낮없이 나팔을 불고 있는 것 같으니 이런 얼굴을 보면 모두 우스워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의 원인이 빤히 들여다보일 때일수록 웃음의 효과가 더욱 커진다는 일반적인 법칙의 또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얼굴을 보고 웃는 원인은 대게 그 사람 기운데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습관성, 무의식성, 혹은 앞서 밝힌 견고성에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만일 이러한 특질이 근본적인 망실 상태라고 하는 한층 더 깊은 원인과 연결될 때에는, 마치 우리의 정신이 그러한 단순한 행동의 즉물성(卽物性)에 열중하고 도치된 것처럼 웃음의 효과는 더욱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풍자화가 웃음의 요소라는 것도 자연히 알 수 있다. 사람의 얼굴이란 아무리 반듯하게 생긴 것 같고 아무리 잘 조화된 선과 정교한 운동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아도 완전한 균형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표면화되지 않은 기울어짐이라든지 비뚤어짐, 다시 말하면 분명히 곧잘 나타내려고 하는 어떤 왜곡이 들어 있는 법이다.

풍자화가의 작품은 이같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경향을 알아내고 그것을 대담하게 확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인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표현을 최대한으로 실현한다면 이렇게 되리라는 선까지 인물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형상(形相)의 조화된 표면을 깊숙이 파고들어가서 심층부에 있는 질료(質料)를 드러내고놓는 것이다.

하나의 경향으로서 자신 속에 원래부터 있었지만 더 높은 힘에 저지당하여 표면에 나타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불균형과 왜곡을 그는 현실화해 놓았다. 그의 그림은 천사에게 굴복 당했던 것을 악마적인 필촉(筆觸)으로써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초상화보다도 사실적이고 별로 과장이 없는 풍자화가 있는 반면에 굉장한 과장을 쓰고 있지만 풍자화가 아닌 그림도 있기 때문이다.

과장으로 웃음의 효과를 내려면 과장 자체가 그림의 목적처럼 보여서는 안 되며, 모델 속에 숨어 있는 왜곡을 우리 눈에 잘 들추어 내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서 느껴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 살피면 왜곡이야말로 풍자화에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특징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움직이지도 않는 얼굴의 윤곽, 코의 곡선, 귀의 모양 같은 데에서도 그러한 왜곡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형상이란 곧 선의 운동이다. 그러니까 가령 풍자화가 어떤 인물의 코를 아주 길게 늘여놓았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특징을 잘 따른 것이라면, 그 코는 오히려 산 것처럼 움직여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그 얼굴이 원래는 아마 현재보다도 훨씬 더 길어지려고 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뜻에서 자연은 풍자화가의 그림을 통해 그 의도를 완전히 실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입을 그려놓고 턱과 볼을 그렸던 바로 그 방향에서 이제는 벌로 이성적인 힘이 구속이나 감시를 받지 않고 시원스럽게 의도했던 왜곡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실계의 소위 우스운 얼굴이란 그 자체의 풍자화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우리의 이성이 따르는 원리가 어떠한 것이든 우리의 상상력은 그것대로 독자적인 또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 상상력은 인간의 모든 형상 가운데 일정한 방향으로 질료를 빚어가려는 정신의 의도를 보이고 있다.

정신은 무한히 부드럽고 끝없이 움직일 수 있으며 인력(人力)의 법칙이 지배할 수도 없기 때문에 땅에 떨어지는 법도 없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의 신체에 그가 가진바 천사의 비상(飛翔)을 불어넣어줌으로써 신체는 생명을 얻게 되며, 이렇게 해서 물질이 갖게 된 비물질성이 곧 우아함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물질은 끝까지 저항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높은 질서의 움직임을 늘 땅 위에 끌어내려 자기의 타성으로써 동화하려 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단순한 자동성으로 전락시키려 든다.

이리하여 한없이 슬기롭고 다양할 수 있는 신체의 운동을 미련하고 단조로운 습관적 운동으로 만들어버리고, 얼굴의 생생한 표정을 고정된 왜곡으로 판에 박아놓는 들 우리의 몸이 산 이상을 호흡하며 끊임없이 생기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떤 기계적인 동작의 물질성에 사로잡혀 가라앉아 버리는 것 같은 모습을 틀에 박아주는 것이다.

이같이 물질이 정신의 외면적 생활을 둔화시켜 그 우아함을 깨뜨리는데 성공했을 때, 물질은 우리의 신체를 통하여 웃음의 효과를 연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앞에서 말한 절차에 따라서) 우스운 것을 그 반대되는 요소와 비교함으로써 정의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움과 대조시킬 것이 아니라(앞서 말한 뜻에서 간추린) 우아함과 대조시켜야 할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스운 것은 반드시 보기 싫은 것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시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추한 모습보다도 그 경화(硬化)를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동작을 보고 재미있게 느껴 그것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예기한 때에 그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웃게 된다. 왜 웃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결국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생명이 아니라 생명 속에 들어앉아서 생명을 모방하고 있는 하나의 자동성에 지나지 않으니, 말하자면 일종의 만화와도 같은 것이다. 그 자체로서는 조금도 우습지 않은 몸짓이 남이 흉내를 내면 우스워지는 것도 똑같다.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의 한 구절에서 따로따로 놓고 볼 때 하나도 우스울 것 없는 얼굴일지라도 똑같은 얼굴이 둘 있으면 웃음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연설하는 사람의 몸짓은 그 자체로서는 조금도 우스운 동작이 아닐지라도 반복되면 웃음을 일으킨다.”,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에는 결코 반복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동작이나 똑같은 두 얼굴을 볼 때 우리는 그 위에 어떤 기계성이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이 생긴 얼굴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이란 마치 같은 판으로 찍어낸 두 장의 그림, 같은 도장을 찍은 두 장의 종이와 같으며,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떤 기계적인 제작과정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이같이 생명이 있는 것을 기계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은 이 경우에 있어서도 웃음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대의 인물이 파스칼의 예처럼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 혹은 그 이상의 대인원이 된다면 웃음의 효과는 더 커진다.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자세를 취하고 똑같이 팔을 움직이며 똑같은 춤, 똑같은 몸짓으로 무대 위에서 약동하는 것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이 그들의 팔과 팔, 다리와 다리, 하나하나의 근육을 횡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듯 완전한 균일성을 이룬 것을 볼 때, 각자의 부드러운 동작은 어느덧 전체적으로 경화되어 버리고, 모두가 생명 없는 자동 기계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무대 연출이 노리는 효과이다. 그들이 비록 파스칼의 저서는 읽지 않았을지 몰라도 실제로 그 말을 최대한으로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웃음의 요소가 순전한 기계적인 효과로 대립된 것을 이해한다면 앞서 말한 연설가의 몸짓은 비록 이보다 좀더 섬세한 점은 있다 하겠으나 결국 똑같은 원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앞서 말한 법칙의 의의가 갈수록 증대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단순한 몸짓에만 적용되는 관점이 아니라, 좀더 복잡한 행동에 대해서까지도 일반적인 설명의 원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희극에서 흔히 보는 어떤 대사, 어떤 장면의 일정한 반복, 각 부분의 조직적인 도치(倒置), 희극적인 오해의 기하학적인 전개, 그 밖의 여러 가지 희극 구성의 기법은 사실상 모두 근본적인 원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희극 작가는 어느 정도 현실 생활의 우연성(偶然性)과 인생 자체의 우연성을 표면적으로 유지하면서, 결국 모든 인간 활동을 시계 장치(時計裝置)와 같은 자동 기계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Henri Louis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수필집 웃음’ ‘물질과 기억’ ‘시간과 자유’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927년 노벨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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