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아버지 / 유경환
한 5년 논설위원실에서 사설과 만물상을 써왔다. 누구보다도 어린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내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신문의 사설로서 어린이에 관한 사설이 지난 5년간 어느 신문보다 많이 나간 것을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러다 반년 동안 풀브라이트의 교환 교수로 미시간 대학에 가 있게 되었다.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가 없어서 절반 정도만 채우고 다시 갈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신문사에 방이 붙었다. 하루아침에 꿈에도 생각 못한 어린이 신문의 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어린이가 중하다고 늘 말해 왔으니까, 이번에 직접 실천을 해보시오!” 이렇게 해서 매일 국민학교 판, 중학교 판 두 가지 신문을 한 20만부 발행하는 책임을 지고 앉게 되었다. 새 책상에 앉고 보니, 일주일 만에 혀가 갈라지고 곪아 들어가 입안이 쓰리고 아팠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는 내게,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어른을 상대하는 것보다 어른의 아버지를 상대하는 일이니 쉬울 리가 있어요?”
어린이를 위한답시고 글만 쓰던 일과, 어린이들이 직접 들고 앉아 읽는 신문을 꾸며대는 일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글이나 쓰고 입만 놀리던 사람에게 주어진 하늘의 일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어른을 위해 일을 하는 것보다 어린이를 위해 하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요즘 어린이들이 내게 직접 가르쳐주고 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면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른에게서 못 배운 것을 어린이에게서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어린이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3천 4백 평의 학교에다 5천 5백 명을 수용하면서 즐겁게 마음껏 뛰어놀라고 하는 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빠끔히 쳐다보는 어린이의 눈빛이다.
10원으로 사먹을 수 있는 과자를 만들어 팔지 않으면서 학교 앞 가게나 노점에서 불량식품을 사먹는다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빠끔히 쳐다보는 눈빛이다.
위생관념을 가르치는 학교의 수돗가에서 물컵이 없어서, 목마른 아이들이 줄을 서서 자기 손으로 한 번씩 수도꼭지를 문지르고 입을 대고 먹는 아이들의 그 눈길이, 선생님의 눈초리에 걸려서 움츠러들 때의 그 눈빛이다.
바로 옆에 학교를 놔두고도 사는 동네의 동(洞)이 달라 버스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그 힘겨워하는 눈빛이다.
오전반 오후반 아이들이 뒤섞여 나가고 들어올 때에 층계에서 부딪치는 어린이들을 보고 야단을 치는 선생님, 이 선생님을 쳐다보는 눈빛이다.
1만 명을 수용하는 학교가 운동장이 좁아서 2부제 수업의 오후반 어린이들에게 학교에 일찍 오지 말라고 교문에 지켜 서서 안 들여보내면 슬금슬금 피하는 어린이들의 눈빛이다.
일기는 자기만의 비밀을 솔직히 적는 것인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읽으라고 명령할 때 그 난처해하는 어린이의 눈빛이다.
어른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있는 이런 눈빛은, 이루 다 여기에 옮겨 쓸 수가 없도록 많다. 그렇다고 어린이가 그 눈빛을 깜박일 뿐이지 무어라고 불평을 하는가 말이다. 무어라고 대드는가 말이다. 혼자서 눈길을 땅에 떨어뜨리고 돌부리를 차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도 어른들은 할말이 있다고 한다. 오늘의 어린이는 오늘의 어른이 자라던 때보다는 행복하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오늘의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엔, 그때의 어린이들 눈빛에서 쑥스러움을 읽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나는 지금도 할 수밖에 없다.
앞만 보고 뛰는 어린이에게 달려드는 차, 골목에서 공을 차다 야단을 맞는 일, 좁고 낮은 걸상에 몸을 웅크려 앉았는데 똑바로 앉으라고 야단치는 일,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는 오늘에 뉘를 탓할 수 있고 뉘를 탓해야 하는가 말이다.
어린이의 생각으론 잘못이 아닌데 그것이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꾸중을 듣고 있는 어린이들에게서 나는 슬픔을 느낀다. 이 슬픔은 우리 어른들이 갈아 먹어야 할 돌가루 같은 약이다. 어린이날은 어른이 약을 먹어야 하는 날이다.
유경환(1936~2007) 2007) 시인, 아동 문학가, 수필가.
1957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아이와 우체통’ 입선,
1958년 “현대문학”에 ‘바다가 내게 묻는 말’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