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그림 / 이경희
그릴 줄은 몰라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림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그림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지없이 즐겁다. 그러나 더 즐거운 것은 가지고 싶은 그림을 손에 넣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그림을 몇 점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나의 서재와 방에 걸어 놓고 있으면 보지 않아도 우선 흐뭇하고 즐겁다.
그런 그림 중에 고 이중섭 화백의 그림도 20여 점이 있다. 대작들은 아니지만 벽에 걸어 놓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품에서부터 10여 호(號)짜리까지, 적어도 한 화가의 생각과 천재성을 감상하기에 별로 부족함이 없는 다양한 것들이다.
물론, 나는 이중섭 화백이 우리 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잘 모른다. 더욱이 그의 그림의 가치도 나 나름대로의 것이지, 예술적인 안목에서 말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소재여서이다. 벌거벗고 고추 달린 사내아이들이 어울려 멋대로의 자세로 끈을 잡아당기고 하며, 또 그 끈 끝에는 물고기가 달리고 하는 것이 설명이 필요 없이 그저 즐겁게 하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닭이나 비둘기와 게는 싸우면서도 평화롭고, 그림 속의 사람들은 바로 그의 가족이며 자화상이기 때문에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물론, 그의 불운했던 생애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뜻에서 그의 그림에 대한 나의 심취는 편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대도 그의 그림에 대해 다른 평론가나 화가들은 나보다 더 열렬히 찬탄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나는 덜 표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의 그림일기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크레용으로 그린 2호짜리와 거의 그의 마지막 기(期)에 속하는 그림일 것으로 보이는 나이프로 긁은 10호짜리의 그림이다.
나는 이 두 그림을 볼 때마다 한 화가가 그토록 대립된 감정 속에서 용케도 견디었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 두 그림은 의식적으로 다른 방에 나눠 걸어 놓고 있다.
그 크레용 그림과 나이프로 긁은 그림 내용이 아이와 물고기인 것은 같다. 그런데 이것이 주는 인상은 그렇게도 양극일 수 없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체의 크레용 그림은 마치 그 천재의 푸른 꿈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이프로 긁은 그림은 시야(視野)가 흐려져가는 절망 속에서 마지막 고하는 어두운 유언 같아 언제 보아도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밖의 어느 그림에서나 하다못해 글씨가 씌어진 노트 조각 위에 그려진 것에서도 나만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딴으로 그런 기분을 더 의미있게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오만이지 덕(德)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난겨울, 나에게 이 그림이 있는 줄 알고 친구가 찾아왔었지만 차마 다 보일 수는 없었다.
아마 그런 기분은 다들 모를 것이다. 다 공개한다는 것은 나만이 맛보고 즐기는 즐거움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처럼 가혹한 요청을 않을 터인데 하고 냉가슴을 앓았지만, 이들은 마치 내가 깍쟁이어서 그런 것처럼 받아주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비장(秘藏)의 그림을 모두 내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안 보이고 간직하고만 있는 것도 나의 즐거움의 하나일 수 있으니깐 말이다.
이경희(1932-) 수필집 <산귀래> <뜰이 보이는 창> <태양을 향해 앉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