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 왕자 / 박남순
연일 30도를 훌쩍 넘기는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데 외손자 삼 형제가 자고 간다고 가방을 메고 왔다. 한 주에 한두 번 만나지만 방학이 되었으니 외갓집 나들이를 온 셈이다.
내 유년시절에도 방학이면 외가에 가는 걸 경사로 여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1학년 그리고 다섯 살 막내까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개구쟁이 삼 형제다. 개성과 성품도 제각각이지만 자기들끼리 의리만은 대단한 녀석들이다.
작은 것도 나눠 먹고, 자리에 없어도 챙겨두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서로 아끼는 모습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간혹 다투기도 하지만 금세 똘똘 뭉친다.
유순하지만 끈기 있는 큰손자, 감성적이며 재주가 많은 둘째와 재치 있고 애교 넘치는 막내까지 사랑스러운 어린 왕자들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누군가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고 했듯이, 나도 손자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나 온다는 날은 미리부터 준비하고, 기대되고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오면서부터 들떠 온지라 집에 들이닥치자마자 달음질을 하며 집안을 운동장 삼아 혼을 쏙 뺀다. 잠시 에너지를 가라앉히는 묘책으로 할아버지와 장기나 오목을 두게 하고, 다 함께 윷놀이를 한다. 가끔 승부욕이 생기면 울고불고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규칙을 제법 잘 지키며 논다.
저녁을 먹이고 나니 재차 놀이동산을 개장한 양 넘치는 에너지 발산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된다. 층간소음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동화책을 읽어주며 소란을 잡아본다.
그것도 잠시, 이런 기세면 밤을 새울 수도 있을 듯 넘치는 활기를 가라앉히느라 나름 또 다른 꾀를 내었다. 누워서 옛날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잠자리로 모아놓고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해님달님, 도깨비 방망이, 발간 모자 이야기로 잠을 유도하니 잠시 후, 두 녀석은 골아떨어지고 큰손자만 듣고 있다.
그러다 슬쩍 근황을 물었다.
“현재야! 학교생활은 어땠어?” 평소 야리야리한 체구에 큰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던 차에 물었다.
“재미있어요.”
“힘든 건 없니?”
“친구들과는 잘 놀아?” “네, 좋아요.”
“공부는 잘하는 편이야?” “조금 잘해요.” 조용해진 시간에 큰손자와 따로 이야기를 모처럼 나눈다.
방학 전, 2학기 회장 선거가 있었다 한다. 아깝데 몇 표 차이로 회장을 할 수 없지만 자기는 그래도 고맙단다. 한 명도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친구들 여덟 명이 표를 준 것도 놀랍다 한다. 본인이 자기 이름을 썼으면 제 표 차이였다며 다음엔 더 잘 해서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의 어린 왕자가 서운했을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짠했지만 그래도 장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 하니, 유치원 때부터 다니는 축구 교실을 영어 학원 일정과 겹쳐 다른 요일로 바꿀까를 제 엄마랑 의논 중이란다.
“그런데? 어떤 일이 고민이야?” 하니, 4년 동안 매주 수요일이면 축구를 하니까 팀워크가 좋아 다른 팀과 시합을 하면, 축구 교실의 같은 학년 여러 팀 중에서 늘 좋은 성적을 내는데, 요일을 바꾸면 한 팀인 친구들과 적으로 만나 시합을 하는 게 슬플 것 같다고 한다.
얘기를 들으니 서운하고 고민이 되겠다 싶어 엄마랑 다시 의논하라며 도닥이다가, 국가대표 선수들도 한 팀이 되었다가도 소속팀으로 복귀하면 적이 된다며, 나름 위로라고 하지만 마음이 또 아릿하다.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다 자정이 넘어 잠을 청한다.
지금 이대로 큰손자의 순수성과 상상력이 유지되길 바란다. ‘어린 왕자’의 비행기 조종사는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어릴 적 그렸는데, 모든 어른들이 모자로 보는 바람에 자신은 재능이 없다며 화가의 끔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 다시 순수성을 찾아가듯이, 큰손자의 재잘거림 속에서 나도 모처럼 평온함을 느낀다.
잠시 전, 짠하게 아파한 것은 손자의 해맑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어린 왕자’에서 순수를 잃어버린 어른은 신하도 없는 나라에 왕이길 우기고, 탐험가가 없어 연구를 못하는 한심한 지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허영심 많은 상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마음이 엮여 융통성을 잃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밤 나의 어린 왕자 옆에서 순수를 찾아가 보려 한다.
앞으로 나의 세 왕자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순수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들만의 장미꽃을 키우기 바란다.
수많은 장미꽃보다 어린 왕자의 한 송이 장미꽃이 더 귀하게 느껴진 것은, 그 둘은 관계를 우선 맺고, 공들여 정을 주고, 길들여졌으므로 소중한 것처럼 우리 세 왕자도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세상의 인연과 좋은 관계를 맺어 누구에게든 서로 필요한 아름다운 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