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철 / 김동식 - 2024년 제8회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여름휴가를 온 딸 가족과 경주에 갔다. 손자가 궁금해하는 첨성대를 먼저 보고 계림 숲에 들른 다음 곧바로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이 우리를 시원하게 맞이했다. 청운교, 백운교 다리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섰다. 석등 불구멍 창을 통해 본 대웅전 큰 어른은 나에게 손자들과 같이 왔냐며 염화시중의 미소로 반겼다. 아이들은 다보탑 앞으로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이 신기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번갈아 오가며 한참 감상했다. 나도 느긋하게 절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지네철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맞배집 지붕널 사이를 지네철이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문화해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지네철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네철은 건축물의 지붕널 벌어짐을 잡아주는 쇠 장식이다. 지네 모양이지만 언뜻 물고기의 뼈와 꼬리를 닮기도 했다. 꺽쇠 기능에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장식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 살지만 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철조각이 박공널을 연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물은 삼국시대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로 동궁월지에서 자물쇠, 가위, 문고리 등 철재류가 출토되었다. 관정 꺽쇠 쇠못은 흔한 편이고, 불국사 극락전 지네철이 말해주듯 목조건물에도 사용하였다. 건물에 어긋남이 생기거나 보수할 때 필요했을 텐데 다른 것들과 달리 지네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궁전과 사찰에 지네철이 부착되어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이 지네에서 맵시 있게 변형하여 다양했다. 경복궁 사정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꽃잎 모양, 운현궁 이로당은 둥근 지네 발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은 날개를 편 새 모양에 복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렇듯 다양한 문양으로 장인의 미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놀라웠다.
포항 보경사 여러 목조건물 널에도 지네철이 붙어있다. 꽁치 뼈 모양은 물론이고 뼈가 많은 청어 닮은 형상도 있다. 일찍이 관목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은 해변 도시에 철강회사가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는 목조건물뿐 아니라 시멘트벽에도 강철 볼트 너트로 꿰맨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생산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지네철같이 나무와 나무를 아우르는데 사용하는 철을 생산하는 포항시민 자부심을 가진다.
내 몸에도 지네철 모양의 자국이 있다. 오른쪽 다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다. 어릴 때 고향 뒷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낫으로 나무를 베다 내 다리를 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자전거에 실려 20리 밖 경주병원으로 갔다. 울며불며 꿰맨 상처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지네처럼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후 난 흉터 때문에 반바지 입기를 꺼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내 살과 살을 연결하여 아물게 해 준 지네철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네철이 있다. 곳곳에 필요하고 또 존재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긋나거나 벌어져 덧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에 보강대가 필요하고 집안 행사에서 의견 충돌로 널이 서로 뻗대면 바로 잡아야 한다. 세대 간 관점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지네철의 역할이 필요하다.
건축물의 그것처럼 사람 사이의 지네철도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으스대며 힘자랑하거나 뽐내고 튀는 자세는 지네철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강철이면서도 서로 뻗대는 양쪽을 끈끈하게 하나로 아우르는 쇠 장식처럼 야무지면서도 인정 있게 양쪽을 보듬는 지혜와 공감력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두 딸이 지네철 역할을 한다. 나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양육을 힘들어하며 딸 둘만으로 만족하였다. 난 그것이 야속하였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 없는 평행선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은 온통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직장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모른 척했다.
감정이 격해져 충돌이 있을 때는 꼬마 아가씨들이 나섰다. 안마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애교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두 딸이 우리 부부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경복궁 꽃망울 쇠 장식보다 몇 배나 더 곱고 사랑스러운 지네철이었다. 자라서도 그 역할은 계속되었다. 집안일에 솔선수범하고 일가붙이 사이에서도 아들 못지않게 의견 조율과 교통 정리를 잘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였다. 특히 큰딸은 때맞춰 결혼하여 늠름한 사위와 두 손자를 안겨주었으며, 이제 3대를 돈독하게 엮는 일에 애쓰고 있다. 딸들의 지네철 역할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다독이며 봉사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을 돕거나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가교역할을 잘하고 있다. 불협화음과 문제성이 있는 단체는 그곳에 몸담았거나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지네철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 교사인 친구가 대안학교에서 학교생활 적응력을 높여주고 사회 진출을 위한 기본 소양 교육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과 검정고시 준비를 해 준 경험이 있다. 직장 퇴근 후 오는 학생들과 공부한 시간이 보람찬 지네철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지네철은 쇠의 숨겨진 미덕이다. 쇠란 완강하고 무거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작지만 섬세한 모양으로 물체와 물체를 다잡아 하나로 묶는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강하면서 부드러운 드러나지 않는 일꾼이다. 그것이 있어 건물과 건물이 제대로 서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간다. 지네철이 삶을 지탱한다. 모양은 별로 없지만 나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한 조각 지네철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