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나의 인생―
                                                                                    이정림

1974년부터 수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글을 썼으니, 수필과 인연을 맺은 지도 23년이 되었다. 한 분야에 이십 년이 넘게 몸을 담아 왔다면 한눈 팔지 않은 인생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내가 줄곧 일해 온 곳은 잡지사 아니면 신문사였다. 그 시절의 내 희망은 거창하게도 명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살맛 나게 한 것은 유명한 분들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을 비롯하여 외솔 최현배 선생, 청전 이상범 화백과 홍익대학의 이마동 학장, 또《현대문학》의 조연현 주간을 비롯하여 아동문학가 이원수·시인 김용호 선생과 같은 문단의 중진 인사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부지런히 기사를 썼고 취재원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신이 꽤 유능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마침내 나는 용기와 무모함의 한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겁도 없이 직업여성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이고도 의식 있는 여성지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과 내 만용으로 창간된 그 잡지는 2호까지 내고 엉뚱하게도 정치적인 탄압으로 폐간이 되는 불운을 안겨다 주었다.

서른도 못 된 나이에 겪어야만 했던 내 인생의 첫번째 실패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꽃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에 성급히 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했던 내 무모한 꿈은 나에게 '순리(順理)'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엽서를 보내는 마음으로〉라는 졸작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삼십대 초반은 실의에 빠져 칩거의 나날을 보내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 암울은 그 이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나, 좌절은 그 이후에 서서히 나를 무기력으로 탈진시켜 갔다."

이십대에 꿈꾸었던 명기자도, 또 의식 있는 잡지의 발행인도 되지 못한 나는 삼십대를 무기력한 노인같이 맞이해야만 했다.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고, 비전이 없는 나날은 내게서 생존의 의미마저 앗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내 삼십대는 정말이지 회색의 늪지대와도 같았다. 나는 매일 매일 그 늪 속으로 한 걸음씩 빠져 들어갔다. 삼십 년을 육십 년만큼 살았다고 하면, 인생이 설령 삼십 년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아쉬울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완전한 무(無)라는 그 자각은 나를 침체의 늪 속에 편안하게 도피하도록 허락지 않았다. 젊은이에게 도피는 무능의 비겁한 다른 이름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나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죽음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그 타인들의 손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펜을 잡았다. 내 빈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펜밖에 없다는 그 깨달음은 깨어진 꿈들의 상처를 어느 정도 아물게 해 주었다. 그래서 72년도《수필문학》8월호에〈정취(情趣)〉라는 짤막한 글을 발표한 이후로 중단했던 글쓰기를 7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글인〈얼굴〉이《수필문예》에 게재됨을 계기로〈아카시아 꽃술〉(《월간문학》),〈하산주(下山酒)〉(《한국수필》),〈진달래와 흑인 병사〉(《수필문학》)와 같은 서정적인 글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러면서《우리가 잃어가는 것들》(범우사),《한국수필문학대전집》(범조사)과 같은 공동 수필집에 원고가 수록되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심심찮게 글을 발표하면서도 나는 정식으로 등용문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70년대 초반은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수필 분야에 추천 제도를 두기 시작한 때였지만, 나는 애초에 문인이 되기 위해 펜을 잡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관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이왕 글을 쓰려면 어디에서 나왔다는 '타이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권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달리 반대할 소신도 없어, 76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수필에 대한 정식 입문 절차를 밟았다. 그 당선작은 지금까지 쓴 어느 글보다도 형편없어서, 나는 요식 행위를 마쳤다는 성취감보다는 그 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한동안 펜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십대의 실패를 딛고 승선한 수필이라는 배 ― 그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하는 도중, 때로는 하선(下船)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멀미하는 사람이 배에서 고생하듯이, 문학적인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 부딪히게 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핑계를 대고 그 배에서 내려올 기회마저 놓쳐 버린 것 같다. 배는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린다. 돛이 낡아 더 이상 바람을 맞을 수 없을 때까지 배는 계속 앞으로 달릴 것이다.

한 대상에 집착하는 열정이 부족하여 나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사랑도 명예도 내가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만큼 절대적이지 못했다. 그렇게 집념이 부족한 사람이 수필 문단의 말석에서나마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자신을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필을 혼(魂)으로 쓴다든지 피로써 쓴다든지 하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수필은 내게 아마추어적 허영이 아니라 프로의 실존과도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