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막차를 탔다. 내릴 때까지 한 번도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사람들, 그 틈에서 축축한 취기를 이기지 못해 머리를 흔드는 취객들까지 막차의 풍경은 늘 비슷하다. 2013년도 덜컹거리며 어느덧 채 두 달도 남겨 놓지 않고 흘렀다. 가을이 깊어간다. 우리의 막차가 시청을 지나 성수 차고지에 닿는 것처럼 우리가 탄 2013년도 곧 겨울을 지나 서서히 차고지로 돌아갈 것이다. 며칠 전 영등포 구청에서 탄 성수행 막차에서 아주 생경한 장면을 목격했다. 졸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시집을 펴 읽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 전공서적이나 토익 책을 제외하고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기에 그가 시집을 읽고 있는 장면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5인치 액정이 아닌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목적 없이 읽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어 반갑기 까지 했다. 무척이나 생경했으며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2013년 현재, 문학은 어느덧 문화의 귀퉁이에 밀려나 있다. 우수 문학도서를 선정해 산간벽지나 농어촌, 어린이 도서관 등 문화 소외 지역에 책을 보급하던 '문학나눔' 사업이 내년에 완전히 폐지되는 것으로 결정 났다. 문화체육부는 연 200종을 선정하고 2,000부씩 40만부를 보급하는 우수문학도서 선정사업의 예산 40억을 전액 삭감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 우수 교양도서 선정 사업과 통폐합해 예산을 142억으로 잡았다. 이렇게 되면 대중문화에서 문학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거의 대부분의 사업은 사업성과나 결과를 숫자로 표현하므로 숫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학장르가 귀퉁이로 밀려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문학이라는 장르의 위축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문화의 다양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류 여론으로 문화가 평준화 되는 끔찍한 일이 많은 자본이 투입된 대중문화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문화는 다양성을 전제로 발전해야 한다. 각 장르마다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있으므로 무조건적인 통폐합 보다는 각자 잘 자랄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줘야 다양하게 성장할 수 있다. 문학나눔에 지원하던 예산 삭감이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과하다. 하지만 현재의 딱딱한 독서 문화에서 일명 고급독자 외에는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토대는 보통 수도권의 몇몇 서점에만 마련돼 있다. 자기 계발서와 문제집을 주로 판매하는 소도시의 서점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시, 소설을 찾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전형적인 '스포트라이트' 체제이다. 집중 조명을 받지 못하는 작가들은 그만큼 설자리가 없으며 이런 현실속에서 문화는 한쪽으로만 편향되기 십상이다. 이런 풍토에서 그나마 공공기관에 배치되던 문학작품들이 줄어든 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창작자와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문화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책은 흔히 독재국가에서 많이 이용돼 왔다. 사회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힘을 가진다면 여론이 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이 문화를 탄압하는 사례를 전세계의 역사에서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나치의 퇴폐예술 탄압도 바로 문화다양성의 말살에서부터 출발했다. 단지 40억의 예산을 삭감했다는 소식 하나에 글을 쓰는 동안 이렇게 까지 생각이 퍼져나가는 것은 물론 좀 과하다. 하지만, 삭감해 버린 40억이 문학이라는 화분 하나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에 밀어놨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
막차에서 본 한 사내의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든 그 남자가 생경해서 시작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다. 씁쓸하지만 한국 대중문화는 다양성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