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 이명애 - 2023년 에세이문학 여름호 등단작

 

 

살구가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떨어지느라 힘들었는지 깨지고 터져 속살이 보였다. 틈새로 진물이 흘러 흙고물이 묻었다. 얼른 주워서 흙을 털어내 주머니에 넣고는 살구나무 뒤에 서서 땅을 푹푹 찼다. 드러난 돌에 발이 찧어 양말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어디 있느냐~ 이리 와 보거라!”

나를 찾는 소리였지만 나는 주머니 속 살구를 만지작거리며 딴청만 피웠다. 살구에서 흘러나온 진물에 주머니도 손도 끈적거렸다. 뒤뜰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할머니는 안방 문을 열어젖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후 뒷문을 열어 또 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나를 꼭꼭 숨겨주었고 시선을 따돌리려고 헛간을 지나 사랑방에 숨어들었다. 쌓아놓은 쌀자루들 틈에 앉아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안방으로 건너와서 인사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몸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머니 속 살구가 뭉개졌다. 낯선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강아지도 쉬지 않고 짖어댔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겨우 두어 달이 지난 때의 일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말을 해주었다면 열다섯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서울에 있는 언니들과 읍내에 나가 있는 오빠와 같이 있었다면 좀 더 났을까. 엄마를 쉽게 저버린 아버지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어린 맘에도 엄마를 떠나보낸 아버지의 쓸쓸한 등이 가엾기 때문이었다.

암만 그래도 할머니 부름에 냉큼 저 방으로 건너가면 엄마를 배신하는 거였다. 이런 갈등이 나에게 일어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 속으로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가서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버텨야 할까. 울렁거리는 가슴 한편에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건너와서 인사드려라.”

잡고 있던 문고리를 풀고 빠끔히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건너다보이는 안방 앞 툇마루에 유월의 햇살이 기웃거렸다. 몇 발자국 사이일 뿐이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섬과 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방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아랫목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그 앞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한 사람이 보였다. 공손히 일어나더니 두 손을 치마폭에 모으고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안방으로 날아들어 팔랑거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나는 엄마라고 부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아버지의 아내로만 대할 작정이었다. 내 마음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생채기 난 살구 같았다. 그런 마음들을 억누르며 안방으로 건너갔다. 절을 하고 나자 새엄마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죄책감이 밀려왔다.

“니 이름이 뭐꼬?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볼 끼라. 그쟈?”

“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얼른 손을 빼 뒤로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게 분명했다. 언니들과 오빠가 나에게 뭐라고 할지 걱정이 되었다. 곁눈으로 본 새엄마는 내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진 눈매를 가진 고운 얼굴이었다. 잡았던 손도 따뜻했다. 경계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내가 싫었다. 새엄마가 가져온 낯설고 비릿한 바다 냄새와 엄마가 남기고 간 복사꽃 냄새가 뒤섞여 방안으로 퍼져나갔다. 지붕 위로 넘어온 바람이 살구나무 잎을 흔들었다.

새엄마는 경상도 섬에서 살았으며 두고 온 아이는 없다고 했다. 그 말에 뭔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동네에 아버지만 바라보고 온 새엄마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윗마을에 새엄마로 왔다던 어떤 여자도 얼마 되지 않아 마을을 떠났나는 소문이 떠돌았다. 잠깐이지만 무언가로부터 또 버려지고 분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의 기우였을까. 그 후 새엄마는 엄마의 손길이 비켜있었던 마당 가장자리에 올망졸망 과꽃을 심었다. 뜰 아래는 돌나물이 납작 엎드려있고 채송화와 봉선화가 서로 눈을 맞추었다. 새엄마는 작고 여린 풀꽃을 좋아했다. 갓난아이를 돌보듯 꽃잎을 어루만지며 대화를 하기도 했다. 마당은 어느새 꽃밭이 되어갔다. 나도 가족 앨범을 펼쳐 보이며 사진에 담긴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잘 지내보자고 내 손을 잡은 새엄마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듯 부끄러워졌다.

이듬해 봄, 살구꽃이 진 자리에 다시 살구가 열렸다. 크고 잘 익은 살구 하나가 장독대를 맞고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생채기도 없이 발그레했다. 매일 비질을 하고 멍석을 깔아놓은 새엄마 덕분이었다. 누가 볼까. 옷에 먼지를 닦아내고는 노랑 저고리를 입고 온 새엄마에게 다가가 살구를 내밀었다.

<등단 소감>

어릴 적 고향집 뒤뜰에는 살구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봄이면 복사꽃하고 나란히 피어나 슬레이트 지붕에 분홍 전구를 달아놓은 듯 환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왔고 아직 한창이던 꽃잎은 멀리멀리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꽃이 진 살구나무 아래에서 병원에 간 엄마를 매일 기다렸습니다. 엄마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은 바닥에 뒹굴어 이리저리 까이고 생채기 난 살구처럼 아팠습니다. 그때 노랑저고리를 입고 온 새엄마를 만났습니다. 살구나무 뒤에 숨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먼저 다가설 수도 없었습니다.

저의 글쓰기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한 장이라도 도착했을까요. 대학에 입학했다고, 착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났다고, 아들딸을 낳았다고 수도 없이 보냈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에세이 문학』에서 등단 축하메일을 받았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약력>

 

-경희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석사

-저서 『엄마는 영어중독자라니까』, 『90일 영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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