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북소리 / 박남주 -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덩, 궁딱. 따드락 딱, 구궁 딱!"
종이박스의 작은 면을 대점으로, 넓은 면을 궁편과 채편으로 삼아 두드리는 고향 친구 유당의 장단은 둔탁했지만 듣고 있는 동안 가슴 한 편이 저려왔다. 장단을 맞춰 추임새를 넣는 친구들도 있었고, 모처럼 만난 반가움에 들뜬 탓도 있었겠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노래를 부르며 지난 옛이야기에 젖어 들었다. 한동안 고수(敲手)가 된 유당이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넌지시 물었다.
"어이 종심, 자네가 고수가 되었어야 헌디, 어째서 아부지한테 북을 전수 받지 않았능가?"
"그렇지 않아도 후회가 되네. 젊었을 땐 여유가 없었지 뭐!"
나는 별 일 아닌 듯 대답했다. 목청이 좋은 죽봉은 '호남가'와 '사철가'를 불렀다. 연한 옥색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봉사하는 사진을 보긴 했지만 직접 만나서 현장에서 들으니 울림이 더 깊었다. 친구들의 북장단과 청아한 목소리는 호령하다 흐느끼고, 숨이 멎을 듯 끊어지다 다시 이어지던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는 전문 고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농사꾼도 아니었다. 3천여 평의 땅에 수확시기가 각각 다른 품종의 복숭아 묘목을 심은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사정으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여름방학 내내 과수원집에서 아버지와 묶여서 지냈다. 마을에 있던 본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과수원까지 점심을 날라야 했고, 방학 내내 그 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다.
어둠이 찾아들어 고요해지면 아버지는 북채를 두드리며 시름을 잊었다. 밤마다 과수원에 울려 퍼지는 아버지의 북소리를 들으며 복숭아도 익어갔고, 나도 한 뼘씩 키가 자랐다. 세로가 가로보다 두 배나 더 긴 시조책에는 가사에 따라 구불구불 높낮이가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저 높낮이와 길이를 어떻게 맞추어서 북을 치고 시조를 읊는지 궁금했다. 시조 책에 그려놓은 높고 낮은 굴곡보다 더 험한 인생길을 넘으려니 밤마다 북을 칠 수밖에 없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북은 판소리 장단에 쓰는 소리북이었다. 한쪽이 작은 구멍이 날 듯 말 듯 닳아 있어서 그쪽은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었고, 북채를 맞는 쪽은 늘 반대쪽이었다. 그렇다고 반대쪽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덜 닳아 있어서 그쪽을 때려야 더 좋은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북채에 맞아 부르튼 소가죽이 매우 두꺼워서 신기하기도 했다.
북채는 두 개였다. 연한 갈색의 박달나무 북채는 아꼈고, 노란빛을 띠는 탱자나무 북채로 주로 쳤다. 매끄러운 배흘림기둥 모양의 북채는 내 손아귀에 들어오고 감촉이 좋아서 무작정 북을 두들겨 보기도 했다. 나는 북을 배울 생각도 하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내게 북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겨울철 과수원집은 소리꾼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나는 수시로 심부름을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멀리 새동의 종수 씨, 가삼동의 치주 씨, 아랫목골 옥규 씨는 단골 초청 대상이었다. 6km도 넘는 본량면의 나 씨 집까지도 갔다. 종수 씨와 옥규 씨는 목소리가 참 좋았다. 내가 들어봐도 굵직하고 음량이 풍부했다.
가끔씩 전문 소리꾼들이 모이는 날에는 장터 입구 식당에서 아버지는 북을 치고 소리꾼들은 돌아가면서 판소리를 했다. 한복으로 곱게 차려 입은 여자 소리꾼이 담배에 불을 붙여 아버지에게 건네주면 동네 형들이 "니 아부지 기생하고 키스했다"고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부끄러웠다. 이런 날에 아버지는 판소리는 하지는 않고 오직 고수로서의 역할만했다.
회갑잔치 때는 꽤 많은 국악인들을 초청해서 마을잔치를 벌였다. 주인공으로서 아버지가 부른 판소리는 굵고 풍성했으며 허스키한 목소리가 적절히 조합되어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유명한 소리꾼과 버금가는 힘찬 목소리였다.
큰 누님으로부터 아버지가 북에 미친 사연을 처음 들었다. 그저 취미로 즐겨 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3남1녀인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삼촌을 6.25전쟁 때 잃었다. 고모부는 상이군인이 되어 전쟁터에서 돌아왔다. 어눌한 말투와 두 개의 목발을 딛고 다니던 모습에 나는 한 번도 가까이 가질 않았다. 한꺼번에 밀어 닥친 불행 앞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북을 두드리는 일 뿐이었다. 더구나 큰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여름이 오면 아버지는 실성한 듯 북을 쳤다. 무더운 여름 내낸 북을 친 이유였다. 밤마다 세상을 향해 토해 놓는 아버지의 울분에 복숭아도 유난히 붉게 익었다. 한여름 밤 아버지의 북소리가 나의 뇌리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다.
북치는 법을 전수 받았더라면 아버지의 슬픔을 가늠해 볼 수 있었을까? 북을 가르쳐 주지 않은 큰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울분이 내게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채를 잡고 자신의 가슴팍을 수도 없이 두드렸을 아버지도 이제 내 곁에 안 계신다. 높고 낮으며 길고 짧은 것을 잘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에둘러 가르쳐 준 아버지도, 과수원집도, 세동의 종수 씨, 가삼동의 치주 씨, 아랫목골 옥규 씨도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종이박스의 장단에 취해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아 북채를 쥐고 두드린다.
"덩. 궁딱 따드락 딱, 구궁 딱!"
아버지가 치던 낡은 북소리와 나의 서툰 북소리가 중첩되어 메아리처럼 두껍게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복숭아가 익어가는 여름밤,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친구들이 모여 앉아 북을 두드린다. 노랫소리는 밤이 깊어 어둠이 옅어질 때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