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천년 운람사 / 김상영 - 2026 경북신문이야기보따리 공모전 대상작
“불이야!”
아랫집 본동 댁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튀듯이 나와보니, 저 멀리 장터 쪽에서 꾸역꾸역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건조한 봄바람을 탄 마른 산등성이가 성난 사자의 갈기처럼 붉게 타올랐다. 화마(火魔)는 우우 소리를 내지르며 삽시간에 앞산마저 집어삼키며 거침없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살다 살다 이런 불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 터지면 이럴까, 평화롭던 시골 마을 모두가 우왕좌왕 정신을 놓았다. 하늘에는 산불 진화 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소방차들이 골짜기마다 비장하게 배수진을 쳤다.
아! 그러나 인간의 사투를 비웃듯 바람은 방향을 바꾸었고, 그러한 불기운이 얼마나 강했는지 숲은 물론 묘지 상석까지 툭툭 튀었다. 급기야 신라 천삼백 년의 세월을 품어온 우리 고장의 자랑, 의성 운람사(雲嵐寺)마저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긴박한 소실 모습이 방송 매체에서 자막과 함께 되풀이되는 화면을 보며, 입만 떡떡 벌릴 뿐이었다. 고요했던 천년 산사는 일순간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화염에 휩싸였다.
청솔잎이 화르르 타오르자, 사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까맣게 숨을 거두었다. 수백 년 세월을 나이테에 새겨온 절제의 시간이 일순에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통곡이었다. 부처님의 자비도, 하늘의 섭리도 그 붉은 광기 앞에서는 속절없이 타버린 듯했다.
운람사는 구름과 산안개가 늘 다정하게 머무는 의성 자미산 중턱의 고즈넉한 사찰이다.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자비로운 미소로 투박한 군민들의 삶을 굽어살피던 곳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보광전이 조선 후기의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이곳 안평에서 자란 우리에게 운람사는 단순한 사찰 그 이상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소풍은 으레 운람사로 갔다. 십 리 산길을 따라 참새처럼 조잘대던 까까머리 학생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곤 했다. 지게에 사이다 상자를 얹은 등짐장수도 연신 땀을 훔치며 우리 뒤를 따랐다. 오층 석탑 기단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수줍게 웃던 흑백사진 속 내 모습은 지금도 빛바랜 풍경으로 안방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부초처럼 객지를 떠돌다가 중년이 되어 귀향한 뒤에도, 사흘이 멀다며 찾던 영혼의 안식처 역시 운람사였다.
고삐 풀린 화마가 휩쓸고 간 뒤, 이웃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타버린 옆 동네 집들을 찾아 사람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라며 눈물 묻은 손을 맞잡고 위로했다. 우리 마을은 불이 붙어 내리는 뒷산 숲에 경운기 분무기나마 연신 물을 뿌린 덕분으로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하지만 불탄 운람사를 두고는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였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꿰고 있는 기억의 가장 깊은 뿌리가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람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래 숱한 풍파를 견뎌온 끈질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상이 재가 되었을 때도, 영조와 철종 시기 법당이 소실되었을 적에도 경북도민과 불자들의 손으로 다시 일어섰다. 얼마 전 불상의 배를 열어 복장유물을 확인했을 때 발견된 ‘개금중수기(改金重修記)’는 그 아픈 부활의 역사를 증명하는 산 기록이었다. 켜켜이 쌓인 세월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문장들은, 우리가 맞닥뜨린 이 잿더미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천년을 향해 나아가는 진통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환란이 덮칠 때마다 선조들은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무너진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덮었을 것이다. 복원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짓는 토목 행위가 아니라, 재난으로 무너진 공동체의 마음 기둥을 세우는 구도(求道)의 과정이었으리라.
한동안 운람사는 어느 때보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시커멓게 탄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벌채되어 실려 나갔고, 사찰 주변은 까까머리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소풍날 동무들 앞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장기 자랑을 하던 추억어린 연리지 숲도 터만 휑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괴산리가 산불의 발화지로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렸을 때, 그 불씨 하나를 막지 못한 안평면민으로서 그저 죄스럽다. 고삐 풀린 화마는 운람사를 넘어 저 멀리 동해안의 어촌까지 덮쳤다. 젊은 날 내가 누볐던 바다, 그 부두에 묶인 채 타버린 고깃배와 단골 횟집 노인네의 주름진 얼굴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산의 아픔이 결국 바다의 눈물이 되어 버린 형국이었다.
그러나 닥친 일을 어이하나. 지금보다 형편이 훨씬 좋지 않았을 선조들도 오뚝이처럼 일어섰지 않았던가. 그 시절엔 대부분 곡식을 탁발하여 절을 지탱했을 것이다. 귀농해 보니 비로소 그 옛날의 형편이 온몸으로 체감된다. 변변한 비료가 있었겠나, 동력 기계가 굴렀겠나. 잡초를 억제할 비닐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다. 봄여름이면 김매기에 삭신이 녹아들고, 소득도 변변찮았을 터다. 나물 먹고 물 마시며 견뎠을 그 질곡의 삶 속에서도, 내 고장의 정신적 기둥인 절을 중건하기 위해 기꺼이 지게를 졌을 선조들이 마냥 존경스럽다.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마침내 희망의 망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경상북도와 의성군이 앞장서고, 전국의 불자들과 군민들이 정성을 보태어 운람사가 다시 세워지고 있다. 중장비의 굉음이 산사의 적막을 깨우고, 목수들이 땀방울을 흘리며 대웅전을 조립하는 모습은 새로운 천년을 깨우는 웅장한 리듬이다. 갓 깎아낸 서까래의 싱그러운 나무 향이 매캐했던 탄내를 서서히 밀어내며 자미산 자락을 채우고 있다. 중건되는 대웅전을 바라보는 주지 스님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스님, 이 시국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이 좋은 날, 울기라도 할까요.”
짐짓 던지는 내 우스개에 기분 좋게 화답한다. 보시하는 신도들과 찾아오는 군민들의 정성이 불나기 전보다 한결 더 갸륵하단다. 요사채를 대신하는 임시 컨테이너 생활도 올 한 해면 끝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기대가 전해온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누워 계신 부처님의 형상을 닮은 대구·경북의 진산 팔공산 능선이 묵직한 응원을 보내는 듯하다. 시커멓게 죽은 줄만 알았던 공사 현장 옆 산벚나무 가지 끝에, 기적처럼 연분홍 꽃샘이 툭툭 터져 나온다.
봄날의 아릿한 기분으로 공사 현장 한편에 가지런히 쌓인 불사(佛事) 기와 앞에 섰다. 검은 기와 한 장 한 장마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과 가족의 건강을 바라는 글귀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나 역시 투박한 붓에 먹을 찍어 기와 등에 이름 석 자와 마음을 적어 내렸다. 화마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이웃들의 안녕과, 다시는 이 아름다운 경북의 산하에 매캐한 탄내가 진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꾹꾹 눌러 담았다. 깔깔한 기와의 촉감이 손끝에 전해질 때, 이 거대한 부활의 역사에 나 역시 하나의 실핏줄로 단단히 연결됨을 느낀다.
적막한 시골 고향의 새벽이다. 나이가 드니 새벽잠이 엷어져 베란다에서 서산(西山)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날이 더러 있다. 운람사로 가는 조붓한 오솔길이 그 산마루에 길게 걸려있다. 마치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연상케 한다.
아랫집 할머니가 세상 뜨고 난 빈집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다. 평생을 억척스레 돈만 모으다가 결국 빈손으로 가신 어른이다.
“돈돈하지 마라, 그저 마음 편한 게 최고니라.”
어느 가을날, 툇마루에 앉아 무심결에 던졌던 그 말씀이 새벽바람을 타고 귓가에 다가선다. 비우고 나니 채워진다는 이 평범한 진리 또한 운람사가 내게 준 가피(加庇)처럼 느껴진다.
불길은 천년의 역사를 태웠으나, 경북도민의 사랑과 선조들의 혼이 담긴 그 재를 거름 삼아 운람사는 다시 새로운 천년을 꿈꾼다. 오늘 내가 올린 작은 기와 한 장이 훗날 운람사를 찾는 누군가에게 비를 피할 지붕이 되길 바란다. 내일의 아이들이 다시 조잘대며 이 청량한 산길을 오를 때, 기댈 수 있는 푸른 쉼터가 되어주길 간절히 빈다. 서산마루에 걸린 새벽달이 시리도록 맑고, 다시 일어설 운람사의 봄날이 따뜻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