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 / 이용호 - 2020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꽃’이라 불리지만, 식물의 꽃이 아닌 꽃이 있다. ‘소금-꽃’이다. 이 소금-꽃이 피어나는 곳이 특별하다. 먼저, 바닷가 염전(鹽田)이다. 사각형의 소금밭 위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열을 받은 함수 표면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무채색 소금밭 함수 속이 꿈틀, 꿈틀거린다. 작은 결정들이 하나 둘 물 위로 떠오르고, 그것들이 서로 엉겨 붙으며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꽃처럼 반짝인다. 그것을 염부(鹽夫)들은 ‘소금-꽃’이라고 부른다.
또 한 곳은 사람의 몸이다. 인간의 몸에서도 소금-꽃이 피어나는 것. 몸에서 배출된 땀이 말라서, 하얗게 보이는 것을 ‘소금-꽃’이라 칭하는 것이다. 뙤약볕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얼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삶의 꽃인 셈이다.
그 ‘소금-꽃’이 가장 뚜렷하게, 집중적으로 피어나는 곳이 있다. 곧잘 인생(人生)-길에 비유되는 마라톤(Marathon)이다. 42.195㎞를 달리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이라는 스포츠 종목이다. 마라톤 참가자들의 몸에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땀이 솟는다. 온몸이 땀에 젖어버릴 정도이다. 그 땀의 결과물이 ‘소금-꽃’이다.
‘마라톤(Marathon)은 한 발 한 발 땀으로 쓴 시(詩)!’ 이 문장을 신문에서 발견하는 순간, 나는 무릎을 딱 쳤었다. 98%의 공감을 이룬 결과였다. 위 문장은 ‘마라톤-대회’를 보도하려는 신문의 기사 제목이었다. 마라톤을 표현하는 그 어떤 은유보다도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문구였다. 한 발 한 발 내딛어, 약 오 만(50,000)번의 발걸음을 해야 다다를 수 있는 마라톤의 결승점. 42.195㎞, 약 100리(?)의 길이다. 수많은 땀방울이 요구되는, 그 고행(苦行)-길이 바로 한 편의 시(詩)란다. 땀으로 쓴 시란다. 참으로, 명문장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마라톤(Marathon)에게 결승선(성취감)을 요구한다. 이에 비해, ‘마라톤’은 사람들에게 ‘땀’을 요구한다. 마라톤은 꾸밈과 거짓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도움도, 그 어떤 편법도 허락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 어느 한 곳이라도 이상이 있는 자는 마라톤에 도전할 수 없다. 마라톤은 체력과의 싸움이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다. 오버페이스(over-pace)가 되어, 달리는 도중 길-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 마라톤 출발선 위에 서면, 나는 신(神) 앞에 선 인간(人間)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진솔해진다. 동시에, 가슴은 짙푸르게 설레기 시작한다.
나의 마라톤 입문-기(入門-記)는 특별했다. 서른아홉(39)살 되던 해 봄, 나는 직장에서 해직(解職)되었다. 죄목은 괘씸죄였다. 나는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 그 직장 내부의 부정부패를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내부-반역자’로 취급하여, 그 조직에서 추방해 버렸다. 비로소, 세상의 낭떠러지 앞에 서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잿빛 우울증 뒤에 곧이어 뽀얀 불면증이 밀려왔다. 약을 먹지 않고는 하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살 충동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마라톤(Marathon)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막 마라톤의 붐(boom)이 일던 때였을 것이다.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초등학교 운동장을 홀로 달렸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허공에 외쳐대며, 외롭게 달렸다. 타원형의 트랙을 수백, 수천 바퀴 돌았을 때, 비로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시나브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마라톤’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던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나의 마라톤에 관한 이력은 아직까지는 초라하다. 10여 차례의 <10㎞-달리기>와 <하프(half)-마라톤> 5회 완주. 그리고, 그것들을 기초로, 풀-코스(full-course) 5회 완주가 전부이다. 풀-코스(42.195㎞) 완주기록은 3시간 43분이다. 초라한 기록이지만, 내 나름으론 최선을 다한 결과이다. 마라톤을 완주(完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오버-페이스(over-pace)’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란다. <초보자를 위한 마라톤 입문서>에서 배웠던 것. # ‘기록을 단 1초라도 단축해야만 한다.’ # ‘나는 남자다. 고로, 여성(女性)에게는 절대 지지 않아야 한다.’
이런 얄팍한 욕망에 ‘오버-페이스(over-pace)’란 늪에 빠지면, 완주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라톤-길 위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 그렇다면, 나이 39살 때, 내가 감행했던, 그 <양심-선언> 행위도 일종의 ‘오버-페이스’가 아니었을까…!?
인생길에 곧잘 비유되는 ‘마라톤-길’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마라톤(Marathon)을 사랑한다. ‘마라톤은 땀으로 쓴 시(詩)’라는 신문기자의 의견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라톤(42㎞) 길 위에서도 ‘35㎞’지점에 애착을 느낀다. 그 공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했던 것.‘마(魔)의 35㎞!’
사람들은 이곳을 그렇게 부른다. 전문 마라톤 선수가 아닌 이상, 이곳에 이르면, 대부분 참가자들이 체력의 고갈로 기진맥진하게 된다. 이곳은 사람들이 진솔해지는 공간이다. 이곳에 이르면 대부분의 마라톤 참가자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땅에 내려놓고, 엉덩이에 흙을 묻히는 것이다. 이곳은 마라톤이란 인생-길에서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간이역’이다.
이곳은 ‘땀’의 공간이기도 하다. 땀에 전 옷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왠지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에서 빛나는 그 눈빛은 바로 앞 사람에게 보내는 최고의 경의(敬意)일 것이다. 이곳은 ‘타인과의 경쟁’이라는 의미마저 잠시 소멸되는 곳이기도 하다. 곧, 땀의 미학(美學)이 발현되는 곳.
‘마(魔)의 35㎞지점’. 이곳은 가슴속의 모든 상념을 땀으로 배출하고 무아경(無我境)이 되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사람의 몸에서 특별한 ‘꽃’이 피어나는 장소이다. ‘소금-꽃’.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목덜미에서, 등에서 ‘소금-꽃’이 피어난다. ‘소금-꽃’이 핀 얼굴로 서로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지만, 대부분 말이 없다. 기진맥진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눈빛으로, 가슴으로 소통을 하는 것.
나: 고맙습니다, 이 고행(苦行)의 길에 동행(同行)해 주셔서.
너: 자랑스럽습니다, 내가 당신의 동행자라는 것이.
나: 정말, 마라톤(Marathon)은 인생(人生)-길을 닮았어요.
너: 마라톤의 가치는 기록보다 완주(完走)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처럼.
나: 오, 당신의 눈썹 위에 ‘소금-꽃’이 피어났군요.
나: 아, 당신의 이마에도 ‘소금-꽃’이 피었네요.
처음 대하는 사람들끼리도 땀의 결실인 ‘소금-꽃’으로 소통이 되는 마법(魔法)의 공간인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시공간…?!
‘마의 35㎞’지점, 그곳은 나에게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잠시 쉬어 가는 간이역이었으며, 사색의 공간이었다. 특히, 검붉은 추억들이 여울져 흐르는 곳이었다. 이윽고, 이곳을 떠날 때면, 검붉은 추억이 발효되어, 새하얀 그리움이 밀려오곤 했었다.
첫 번째, 두 번째까지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널브러져,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누워서 자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세 번째 ‘마라톤-길’부터는 달랐다. 몸의 피로-도는 비슷했지만, 뭔가 달랐다. 마라톤에 대한 내공(內功)이 쌓인 결과였을까. 마음의 여유였을까. 길가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곳 주위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논과 밭 속의 작물들이 보이고, 강변 마을이 보이고, 성당의 첨탑도 보였다.
동행자들의 뒷모습이 보이더니, 내 뒷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달려온 길이 보이고, 앞으로 달려갈 길도 보였다. 그리고, ‘땀’이 보였다. 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과 동행자들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 그리고, 땀이 말라 형성된 ‘소금-꽃’도 보였다.
세 번째 마라톤-길 위에서, 그 ‘마(魔)의 35㎞’지점에서 나는 그들을 용서했다. 괘씸죄라는 명분으로, 나를 세상의 낭떠러지 앞에 세웠던 사람들, 약 5년 동안이나 나를 불면증에 시달리게 만들었던 사람들, 내 머리카락을 반백으로 만들어 버렸던 사람들. 그 옛 직장 동료들을, 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용서했다. 결국 나는 그들을 ‘땀’의 이름으로, ‘땀’의 권위로, ‘땀’의 진실로 용서했던 것. 그들을 용서하고 나자, 내 가슴속에는 ‘소금-꽃’ 한 송이가 함초롬히 피어나고…!
‘마라톤은 한 발, 한 발 땀으로 쓴 시(詩)’
하지만, 나는 이 신문기자의 절묘한 표현에 짙푸른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마라톤은 시(詩)보다는 수필(隨筆)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필 문학의 특성은 픽션(fiction)을 가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시(詩)와 소설(小說)은, 그 내용에 있어서, 얼마든지 픽션(fiction)을 가미할 있다. 무엇이든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는 것. 수필-문학의 또 하나의 특성은 작가 자신이 그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주인공 자신이 한 발-한 발 내딛고, 한 땀-한 땀 흘리며, 약 4시간 동안 주어진 ‘외-길’을 달려가야만 완성이 되는 마라톤은, 바로, 생생한 수필(隨筆)이다. 인생(人生)이 마라톤(Marathon)에 비유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마라톤이 한 편의 수필이라면, <마(魔)의 35㎞지점>은 한 편의 시(詩)다. 즉, 마라톤은 <마(魔)의 35㎞지점!>이라는 한 편의 시(詩)를 씨앗처럼 품고 있는 수필(隨筆)인 것. 그 수필의 주제는, 땀의 미학(美學)인, 바로 ‘소금-꽃’이다.
[당선소감]
나는 오늘도 시내 천변-길을 따라 달린다. ‘땀’과 ‘소금-꽃’의 새로운 미학(美學)을 발견하기 위하여 달리는 것. 그리고, 내게 주어진 ‘생(生)’이란 ‘마라톤(Marathon)’을 완주(完走)하기 위하여 달린다. 민들레, 쑥부쟁이, 코스모스, 억새꽃들과 참새, 까치들과 고추잠자리, 나비들이 내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의 눈빛을 보내주고 있다.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나 때문에 떨어진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신춘문예-공모전에서 낙선의 고배를 수없이 마셔 본 사람으로서, 당선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민주주의(民主主義)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 문제는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민법(民法) 제678조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현상(懸賞)공모의 심사 결과에 대해서는 이의(異議)를 하지 못한다.’나도, 신춘문예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대부분 그 심사-결과에 수긍을 했지만, 그 심사결과를 인정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당선된 작품이 내 응모작품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신춘문예는 작가의 등용문 중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제도이다. 그런 만큼, 그 권위에 걸맞은 심사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민주적인 심사 절차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우리 문학-계(界)만이라도 이런 민주적인 절차를 도입해 보자. 이것이 바로 나의 당선소감의 핵심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자세, 즉 작가정신이며, ‘산문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사평]
전체적으로 사유의 전개들이 활발한 편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가 교훈적으로 전개된 작품들이 더러 있었다. 사건 내용이 너무 많으면 주제가 흐려질 수도 있다. 또한 대상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수필이 꼭 지나간 추억을 과거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대해 직접적인 접근 방식, 현재형인 접근 방식이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은숙의 「빨래집게」는 박진감이 있는데 비해 많은 장면의 연갈이가 심해 맥이 끊어지는 것이 흠이었다. 김선자의 「조락을 읽다」는 서정성은 우수하나 사실적인 내용 전개가 빈약한 편이었다. 곽혜순의 「내 양심, 바람났던 날」은 진정성은 있으나 함께 보낸 작품에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희경의 「키다리 아저씨」는 비유적 사유가 탁월하지만 이야기 전개를 설명으로 하다 보면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이용호의 「소금꽃」은 마라톤을 통해 불면증에 시달리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인내심이 사실감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용호의 「소금꽃」에 기꺼이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이구한 문학평론가, 박지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