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상 수상자 욘 포세 작품
사후에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한 실존 화가의 불안한 내면 다뤄
실제와 망상 오가는 환상적 독백… 장르 경계 허문 시적 문체 인상적
◇멜랑콜리아 I-II/욘 포세 지음·손화수 옮김/540쪽·1만7000원·민음사
누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곤 불안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을 하기에 자격이 없을 거라고, 일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갇힐 때도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곤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사진)가 1995년 발표한 ‘멜랑콜리아 I’은 누구나 느끼는 불안과 우울이란 감정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1853년 독일 뒤셀도르프다. 화가 지망생 라스는 멋진 보라색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곧 그를 제자로 받을지 결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에서 퇴짜를 맞을까 걱정하며 “내 그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 나는 오직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을 뿐이다”고 되뇐다.
그는 불안을 떨쳐 보내기 위해 자신이 짝사랑하는 헬레네를 생각한다. 헬레네는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의 딸이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는 데 환상만 한 게 있을까. 그는 “두 팔로 헬레네를 감싸 안았고, 가슴은 자신도 모를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상은 망상으로 커진다. 그는 헬레네의 삼촌에게 자신과 헬레네가 연인 사이라고, 삼촌이 헬레네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숙집에서 쫓겨나고, 망상에 가득 찼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멜랑콜리아 I’은 실존 인물인 노르웨이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의 생애 중 이틀을 소재로 했다. 죽은 뒤에야 세상의 주목을 받은 라스의 실제 인생에 소설적 상상력을 버무렸다. 라스가 정신착란에 빠진 건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지닌 이 불안을 포세는 문학으로 극대화했다.
포세가 1996년 발표한 ‘멜랑콜리아 II’는 라스의 누이이자 허구의 인물인 올리네의 삶을 그린다. 1902년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 사는 올리네는 치매를 앓고 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허둥거리고 기억을 잊을 때마다 좌절한다. 파편처럼 부서지는 올리네의 머릿속에선 이미 세상을 떠난 라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소녀 시절 라스와 행복하게 뛰놀던 기억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두 작품을 묶은 ‘멜랑콜리아 I-II’엔 포세의 문학적 특성이 짙게 묻어난다. 포세는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조금씩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혼잣말로 내뱉는 문장은 연극 배우의 대사처럼 시적이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재림이자 아일랜드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희곡과 산문의 경계를 부순 포세 답다.
책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는 서술 방식 때문에 쉽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현학적인 문장은 적고, 서사를 파악하긴 쉽다. 우울증(Melancholia)에 시달리는 현대인이라면 주인공들이 겪는 혼란도 와닿을 것이다. 작가는 노르웨이 표준어 중 인구의 10∼15% 정도가 쓰는 뉘노르스크어로 작품을 쓴다. 이 언어는 자체적인 리듬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화수 번역가는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