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강의
영화 속 문화 읽기
김성곤(서울대 명예교수. 다트머스대 객원교수)
모든 것의 경계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타문화에 대한 이해는 글로벌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데에도 문화적 이해는 이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만 하는 사전조건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영국 버밍엄 대학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시작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영화텍스트를 문학텍스트와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은 이래, 그리고 문화상품, 문화전쟁, 그리고 문화융합에 대한 논의가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이래, 영화는 문학과 더불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중요 텍스트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영화 속에서 문화를 읽어내려고 했던 국내 첫 시도였던 [김성곤교수의 영화에세이](1994)가 출간된 이후, 영화를 통해 한 나라의 문화를 읽어내는 작업은 비단 영화동호인들뿐만 아니라 학계와 대학 강의실로까지 확대되어서, 이제 영화는 대학교에서 문화연구나 문학수업의 필수적인 텍스트로 부상했다. 위 책의 한 장(章)인 [현대가정의 위기: <나 홀로 집에>와 위기의 아이들]이 제7차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영화를 통한 문화읽기는 드디어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에서도 그 필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화는 이제 단순히 교양이나 엔터테인먼트에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특성과 한 시대의 사회현상을 다각도로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문서이자 문화텍스트로 자리 잡았다. 과연 영화텍스트는 문학작품과 더불어 특정 국가의 문화나 당대의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주는 문화매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마치 문학작품을 읽을 때처럼, 삶의 다양한 양태와 더불어 당대의 문화현상이나 문화적 특성, 또는 한 나라의 시대상황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문화는 비단 인문학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또는 의학이나 공학에서도 문화적 이해는 교양과 학문의 기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이나,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로봇이나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에 대한 영화의 경우에는 생체윤리나 과학기술의 문제점까지도 성찰해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영화 읽기를 통해 인문학은 자연과학이나 의학, 또는 공학과도 만나게 된다. 그렇데 되면, 요즘 부상하는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문화텍스트/ 사회문서로서의 미국영화
오늘날 영화는 문학작품과 더불어 한 국가의 사회상과 한 민족의 집단심리, 그리고 한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는 중요한 문화 텍스트이자 가치 있는 사회문서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가 주종을 이루는 미국의 경우, 미국영화는 매 시대 미국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극장에서 미국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당대 미국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동시대 미국인들의 집단적 꿈이나 두려움과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샌 디에고 주립대학교의 제리 그리스월드 교수는 “미국인들의 집단적인 꿈이나 두려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극장에 가서 당대의 미국영화를 보면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을 문화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헐리웃 영화가 미국의 가치관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수단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헐리웃에서 미국문화를 다른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화 속에 미국문화를 집어넣는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헐리웃은 당대의 문예사조나 정치이념, 그리고 대중들의 집단 심리를 정확하고 재빨리 파악해 영화화하는데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다. 예컨대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맞벌이 부부들의 우려가 미국사회의 첨예한 문제로 부상했을 때 헐리웃은 「나 홀로 집에」를 제작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기말의 불안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에는 「볼케이노」나 「단테스 피크」(화산폭발)나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유성 충돌), 또는 「엔드 오브 데이즈」나 「미디언」(기독교적 종말)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으며, 인공지능과 가상현실과 인간복제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을 때에는 [버추얼 리얼리티],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또는 「멀티플리시티」나 「여섯 번 째 날」을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다.
헐리웃의 이와 같은 신속함의 근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자리 잡고 있는데, 첫째는 돈을 벌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에서이고, 둘째는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한 부단한 연구와 노력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겟 쇼티」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플레이어」가 풍자하고 있듯이, 헐리웃은 물론 물질주의적인 사람들과 철저한 상업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헐리웃에는 나름대로의 특성과 투철한 작가 정신을 갖춘 명감독들과, 노련한 연기력과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유명배우들, 그리고 좋은 스크립트를 제공해주는 뛰어난 작가들도 있다. 그래서 거장 감독들과 유명배우들이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세기의 명작들을 만들어내면, 제작사의 홍보팀이나 판촉팀들은 신속하고 광범위한 광고와 배급을 통해 막대한 돈을 거둬들인다. 헐리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기 전에 우선 헐리웃의 그와 같은 이중적 구조와 특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헐리웃은 관객들에게 돈을 받고 꿈을 파는 곳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있고 감동을 주며 꿈을 심어주기 때문에 돈을 내고 극장에 간다. 그래서 헐리웃 영화는 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존 설리번(John Sullivan)의 지적대로, 헐리웃의 영화산업을 지칭하는 용어인, “엔터테인먼트 인더스트리 Entertainment Industry” “쇼 비즈니스 Show Business” 또는 “드림 팩토리 Dream Factory”같은 말은 두 가지 상반되는 단어로 이루어져있다. 즉 ”엔터테인먼트“나 ”쇼“나 ”드림 같은 문화적 용어와, ”인더스트리“나 ”비즈니스“나 ”팩토리“ 같은 상업적 용어의 혼합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는 곧 헐리웃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주는 적절한 은유가 된다는 것이다.
헐리웃의 그러한 양면성은 그곳에서 제작되는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 중 일부는 소위 상업적 쓰레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헐리웃은 동시에 훌륭한 대작들과 명작 영화들도 만들어내 관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또 헐리웃은 때로 지배문화와 지배권력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반체제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이나 「살바도로」나 「JFK」같은 영화들, 또는 마이클 모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나 [화씨 911도] 같은 영화들은 헐리웃이 결코 단순한 지배 권력의 시녀나, 단일한 미국적 가치의 해외수출 창구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전 영화만 해도, 헐리웃은 베트남전을 지지한 존 웨인의 「그린베레」와 더불어, 베트남전을 비판한 「디어 헌터」나 「지옥의 묵시록」, 또는 「풀 메탈 자켓」이나 「햄버거 힐」같은 반전영화, 그리고 그 이후에는 베트남전을 패러디한 [트로피컬 선더] 같은 코미디영화도 만들었다. 물론 반체제 관객들을 의식해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헐리웃이 그런 영화들을 만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런 견해는 올리버 스톤 같은 감독이나 제인 폰다 같은 배우들의 반체제 성향이나 신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너무 단순한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디 앨런의 뉴욕영화들이나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들이나 수상작들은 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영화들이 아니다.
월트 디즈니사가 해마다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역시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컨대 남미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만은 「도널드 덕 이야기(Duck Tales)」에 나오는 스크루지 오리 할아버지가 미국식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고, 「포카혼타스」는 인디언을 비하하고 있으며, 「알라딘」은 아랍인들을 악한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어린이들을 세뇌시키고 미국식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 탐린슨(John Tomlinson)은 도르프만의 주장과는 반대로 「도널드 덕」이 사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비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 「포카혼타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며, 「알라딘」 역시 아랍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진시켰다는 상반된 이론도 나와 있다.
그래서 성급하게 헐리웃을 단순화하고 한 면만 보고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헐리웃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실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단순하지가 않고 복합적이어서 종전처럼 단순한 이분법적인 분류나 비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미국영화를 비판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제는 어떤 것이 미국영화인지 조차도 예전처럼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게 되었다. 해외영화에도 미국배우들과 미국자본이 투입되어 있는가 하면, 미국영화에도 해외감독들과 배우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존 설리반은 이렇게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미국영화인가? 감독이 미국인이면 미국영화인가? 아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레니 할린이나 존 우(오우삼)는 미국시민이 되기 전에 이미 미국영화를 만들었다(내가 알기로 존 우는 아직 미국시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배우가 미국인이면 미국영화인가? 아니다. 로렌스 올리비에나 오마 샤리프나 앤소니 홉킨스나 조운 첸은 미국인이 아니지만 미국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촬영하면 미국영화인가? 아니다. 「로드 짐」은 캄보디아에서, 「아프리카의 여왕」은 아프리카에서, 「지옥의 묵시록」은 필리핀에서, 그리고 「타이타닉」은 멕시코에서 찍었다. 또한 많은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미국인 것처럼 위장해 캐나다에서 촬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제작자금이 미국에서 나와야 하는가? 아니다. 미국 영화사 중 하나는 소니 것이고, 독립 영화들은 세계 각처에서 자금을 지원 받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미국영화란 말인가?
(「설리반, 「미국의 영화산업」)
설리반의 지적대로,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느 것이 순수한 미국영화인지 알 수 없는 복합적인 리얼리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단 하나의 분명한 정체성만이 허용되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복합적인 정체성이 허용되고 또 장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영화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나 비판 또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헐리웃 영화에 대해 우리가 굳이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분개하거나 대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했을 때, 우리 역시 우리의 문화나 정서가 들어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외국에 수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헐리웃의 한국진출은 문화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넷플릭스를 통한 한국영화나 드라마의 세계 진출에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 대단히 이기적이고 모순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영화 중에는 과도하고 적나라하게 팍스 아메리카나를 선전하는 질 낮은 영화들도 있을 수 있고, 유색인종을 전형화 하거나 범법자로 출연시키는 영화들도 있는데, 그런 영화들은 무시하거나 비판하면 된다. 또 보수주의적인 공화당 정권이 집권하면 헐리웃은 언제나 우파 보수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영화들을 제작하는데, 이는 지배문화 이데올로기에 따른 영화를 만들면 시대의 조류에 부합되어 우선 많은 관객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레이건이 좋아했다는 [람보]나 [탑건] 같은 영화나, 조지 부시 시대에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되다가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종영된 텔레비전 드라마인 [24]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미국영화가 상업적이고 정치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영화가 언제나 미국의 미화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종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지만, 미국영화 중에는 뜻밖에도 우리 같으면 감추었을 치부를 과감히 드러낸 영화들도 많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심지어는 인종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 자신들의 치부까지도 세계시장에 팔아 돈을 벌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치부를 은폐하지 않고 과감히 드러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굳이 비판을 하려면, 비판의 수준을(수위가 아니라) 한 단계 높여, 인종문제를 다룬 미국영화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저 극장에서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를 보고 잠시 감상에 젖게 하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극장을 나서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잊어버리게 해줌으로써, 인종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편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 수상작 한국영화 [기생충]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국영화 역시 당대의 한국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2020년 아카데미 수상작인 [기생충 Parasite]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부자와 빈자로 양극화된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자본주의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그린 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관객들은 그런 생각이 단지 일부만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연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심각한 갈등이 없다. 부자인 박 씨 가족은 가난한 김 가족을 도와주고 있으며, 김 씨 가족은 부자 집에서의 생활을 즐긴다. 행복한 김 씨 가족의 안정과 평화를 깨는 것은 부자 박 씨가 아니라, 박 씨 가족이 캠핑을 간 사이에 찾아온 또 다른 가난한 가족의 등장이다. 가난한 두 가족의 싸움은 결국 부자 박씨 가족까지 파멸시키고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부자와 빈자의 싸움을 그린 영화라기보다는, 부정한 수단으로 부자의 돈을 빼앗으려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싸움이 초래하는 사회 전체의 파멸을 코믹한 터치로 그린 영화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과연 [기생충]은 뛰어난 코미디, 또는 비극적 코미디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희극적인 장면이나 대사에 자주 웃게 된다. 슬픈 것은, 부자 집을 이용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가난한 김 씨 가족이 사용하는 방법이 사기, 문서위조, 경력위조, 거짓말, 중상모략이라는 점이다. 김씨 가족은 착한 사람들이어서, 가진 자의 재산을 빼앗아 갖는 공산주의자들은 아니지만, 비도덕적이고 부당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결국 몰락하게 된다.
예컨대, 부잣집 딸의 영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기 위해 김기우는 대학 재학증명서를 위조한다. 그리고는 여동생 기정을 그 집 아들의 미술 치료사로 취직시키기 위해 가족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기정의 경력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기정은 카섹스를 한 것처럼 운전사를 모함해서 내쫓은 다음, 또 다시 부녀관계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기 아버지 기택을 그 자리에 추천한다. 운전사가 된 기택은 복숭아 앨러지가 있는 그 집 가정부를 폐결핵 환자로 몰아서 내쫓은 다음, 자기 아내 정숙을 가정부로 취직시킨다.
[기생충]에서 부자인 박 씨 가족은 김 씨네 가족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들로 등장하는 반면, 가난한 김씨 가족은 교활하고 악의적인 사람들로 등장한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박 씨 부부가 기택의 체취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기택의 면전에서 그걸 언급해 모욕을 준 적이 없다. 기택이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부자는 빈자를 착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한 김 씨네가 부자인 박 씨네를 착취한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부자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빈자의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과연 [기생충]은 부자나 빈자의 편을 드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부자와 빈자, 또는 숙주와 기생충의 상호의존과 상부상조를 그린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빈자는 가해자로, 부자는 피해자로 제시되고 있다. 부자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실망이겠지만, 그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런 면에서 기택과 정숙의 대화는 다분히 시사적이다. 박씨 부인이 부자인데도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정숙은 “사람이 좋아서 부자인 것이 아니라, 부자여서 사람이 좋은 거야.”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기택은 “부자들은 나이스하고 원한이 없어.”라고 말한다. 이 대화는 [기생충]의 주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숙주의 순진성을 이용해 기생충이 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경쟁관계의 기생충을 제거하는 것도 비도덕적이다. 그리고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죽는다.”
가난한 김 씨 가족은 언젠가 결혼을 통해 부자인 박 씨의 저택과 재산을 소유하는 백일몽을 꾼다. 그러나 그들의 허황된 꿈은 지하 벙커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등장으로 무산된다. 이 영화에는 대저택을 소유한 부자, 반 지하에 사는 주인공 가족, 그리고 지하벙커에 사는 예전 가정부 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서로를 죽임으로써 이 세 가족은 결국 모두 파멸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저택은 독일 가족에서 팔린다. 그러한 설정은,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이면 다 같이 파멸하고, 우리나라는 결국 외국에 팔려나간다는 경고처럼 보인다.
마지막엔 기택은 박 씨를 죽이고 박 씨네 저택의 지하벙커에 숨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생충 생활을 영위한다. 기택은 모르스 부호로 아들 기우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아버지의 메시지를 읽은 기우는 언젠가 돈을 벌어서 그 저택을 사서 아버지를 해방시키겠다고 결심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게 꼼수를 써서 저택을 가지려고 하는 것 보다는 올바른 정도일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저택을 사는 것만이 거기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공존해야만 한다. 그게 이 영화에서 우리가 배워야하는 교훈이고, 바로 그것이 이 영화를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만들어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들과 영화 [미나리]
영화 [미나리]는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2021년 브리티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그리고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여우조연상을 받음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나리]는 1980년대 초에 아칸소 주의 시골에 정착해보려고 노력하는 한국계 이민가정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주인공 제이코과 아내 모니카도 처음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 일로 미국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제이콥은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칸소의 시골로 이사를 가서 병아리 감별 일을 하는 한편, 농장을 사서 농작물을 재배해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꿈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농장 일은 제이콥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모니카는 심장이 약한 아들 데이빗의 병원과 딸 앤의 학교가 너무 멀어서 걱정한다. 그들의 집이 마을의 병원이나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진 농장에 있는 트레일러 모빌 홈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에게는 농장에서의 성공이 가장 큰 관심사였고, 모니카에게는 가족이 가장 큰 관심사이여서 둘은 자주 부부싸움을 한다.
낮에는 부부가 둘 다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해야 해서, 그들에게는 누군가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니카의 모친인 순자 할머니를 초청한다. 처음에 아들 데이빗은 한국에서 온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츰 그는 할머니를 좋아하게 되고, 할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제이콥은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19세기의 미국 서부에 정착했던 개척자들처럼 그는 혼자 힘으로 우물도 파고, 농장을 가꾸며, 채소를 재배한다. 과연 농장 일로 성공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아내에게 그는 “한 번쯤은 사람들에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제이콥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분명 미국인의 프런티어 정신을 상징한다. 과연 그는 미국인처럼 말한다.—”비록 실패하더라도 한 번 시작한 것은 끝내야만 해.“
제이콥은 자신이 농장 일에 실패해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왜 수컷 병아리를 골라내어 죽이는가를 묻는 아들 데이빗에게 제이콥은 이렇게 대답한다.—“수컷 병아리는 고기도 맛이 없고 알도 낳지 못해서란다.” 제이콥은 자신이 수컷 병아리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도태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할머니 순자는 한국인의 정신을 상징한다. 자신이 한국에서 가져와서 집 근처의 개천가에 심은 미나리처럼, 그녀는 강하고 인내심 많은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순자 역시 강인한 여성이다. 한국에서는 미나리가 독성을 흡수한다고 믿기 때문에 육개장 같은 탕 음식에 같이 넣고 끓인다고 한다. 순자 또한 그런 미나리처럼 이민 가정의 스트레스를 흡수하는 치유제의 역할을 한다.
순자 할머니는 심장이 약한 데이빗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영화의 마지막에 데이빗은 화재로 넋이 나가서 헤매고 있는 할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심장질환을 이겨내고 처음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순자 할머니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절망을 이겨내고, 손자들에게 삶의 지혜도 가르쳐준다. 예컨대, 미나리 옆에 꽈리를 틀고 있는 뱀을 두려워하는 손주들에게 그녀는 “숨어 있는 것이 훨썬 더 무섭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니카는 어쩌면 가장 복잡한 심정의 여인일 것이다. 남편의 미국정신과 모친의 한국정신 사이에서 그녀는 때로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 둘 사이를 잘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잠시 이혼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역경을 극복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런 면에서 모니카 역시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남편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는 한국여인의 장점을 갖추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재가 발생해서, 안타깝게도 제이콥이 드디어 판로를 개척해서 판매하기로 한 농작물이 모두 다 불에 타버린다. 그래도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강인한 미나리처럼 이씨 가족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합심해서 다시 일어서기 때문이다. 모든 농작물이 다 타버린 후에 제이콥과 아들 데이빗이 미나리를 수확하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이 영화는 리 아이삭 정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계 이민 가족은 숱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 땅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미나리]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가 미국사회에 펴져나가던 때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시의 적절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영화는 한국계 이민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미국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처럼 한국계 이민들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고 기어이 성공하는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미나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단 한국계 뿐 아니라, 모든 아시아계 이민들에게도 커다한 호소력을 갖는다.
영화는 이렇게 당대의 문화와 사회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텍스트이자 중요한 사회문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구나 활자매체보다는 영상 매체에 더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영화는 세상을 배우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킹덤]에 나타난 좀비(Zombies)들과 당파싸움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한국 텔레비전 사극 [킹덤]은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직후의 조선시대가 배경이다. [신들의 왕국]이라는 웹 코믹을 원작으로 한 [킹덤]은 외적으로 침입을 받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권력다툼에 빠져있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조선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킹덤]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영의정 조학주와 그의 딸인 왕비가, 그들에 반대하는 다른 대신들과 벌이는 궁중암투 이야기다. 그 와중에 궁중에서는 왕이 죽었거나, 무서운 병에 걸려 좀비가 되었다는 소문이 돈다. 실제로 왕은 낮에는 죽었다가 해가 지면 깨어나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악용해 권력을 쥐려는 영의정 조학주는 소문을 부인하고, 세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해 왕의 처소 방문금지령을 내린다.
부왕의 병을 조사하기 위해, 세자는 호위무사와 함께 옛 어의가 의원으로 살고 있는 동래로 내려간다(동래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맨 처음 상륙해 공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에서 세자는 왕에게 물려죽은 후에 어의가 싣고 간 시체로 인해 이미 마을이 오염되어 많은 주민들이 좀비로 변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세자는 살아남은 마을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는 동안 영의정 조학주는 정적들을 의금부로 잡아다가 고문하고 제거한다. 그는 심지어 세자도 반역자로 몰아서 한양으로 압송해올 군사를 동래로 보낸다. 세자는 겨우 이웃마을로 피하는데, 거기서 어렸을 때 궁에서 자기를 보살펴주었고 지금은 낙향해있는 대감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킹덤]의 시즌 1은 거기서 끝난다.
시즌 2에서도 더 많은 내용이 공개되지만, 이미 시즌 1에서도 중요한 주제들이 발견된다. 우선 왕이 무능해 신하들의 권력다툼을 막지 못하고, 자기가 지켜야할 백성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그리고 좀비 전염병을 맨 처음 퍼뜨리는 사람도 왕이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왕이 이상한 병에 걸린 것은 영의정 조학주 때문이라
는 힌트도 발견된다.
다음으로, 나라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대신들은 당파싸움에만 몰두해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외척들, 즉 왕비의 일가친척들이 권력을 휘두른 적이 많았다. 그들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숙청했고, 반역자로 몰아서 당사자 뿐 아니라 삼족이나 구족을 멸하기도 했다. 역사도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조선의 대신들이 나라의 미래보다는 눈앞의 권력쟁취에 더 관심이 있었던 한심한 사람들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건 지방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관직은 대부분 보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관리는 부임하면 동네 부호들과 결탁해서 돈을 받았고, 백성들을 착취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러므로 부패와 무능은 조선 지방관리들의 특징이었다. [킹덤]에서도 지방관리들은 좀비의 습격으로부터 백성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들 도망치기에 바쁘다.
마을의 양반들도 무능하고 한심하기는 다름이 없었다. “부모가 주신 신체는 훼손하면 안 된다.”는 유교풍습의 고집을 부려 좀비에게 물린 가족의 시체 화장을 반대하고 갖고 있다가 도망치는 배에 몰래 실었다가, 배에 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마을 사람들 역시 한심한 것이, 대책을 세우는 대신 모여서 귀신을 쫒는 무당의 푸닥거리나 하고, 가짜 부적이나 만들어 사고파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조선은 총체적으로 한심한 나라였다.
좀비도 대단히 상징적이다. 물론 원작자의 말대로 좀비들이 당시 악랄한 세금과 착취에 시달린 백셩들의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영혼이 없이 떼 지어 다니며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해친다는 점에서 정치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사람들의 은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좀비는 정치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전염성이 강하며, 한번 물리면 사람을 전혀 다른, 설득이 불가능한 공격적인 존재로 바꾸어놓는다. 좀비는 자기네들끼리만 몰려다니며, 다른 집단을 공격해서 자기들과 같은 존재로 바꾸어놓는다.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강력한 전염성과 더불어 집단으로 몰려다니고 막무가내여서 타협이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그런 사람들은 뒤에서 조종하는 정치세력으로부터 이용당하기 쉼다.
사극은 우리에게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비록 판타지이기는 해도 [킹덤]은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알람브라의 추억] 서울과 그라나다의 사이에서
일견, 알람브라 궁전은 제4차 산업혁명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알람브라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13세기에 세워진 이슬람 궁전이고, 제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3D 프린터, 스스로 운전하는 스마트 자동차, 드론 테크놀로지, 나노 테크놀로지, 5G 모바일 통신망, 그리고 증강현실을 지칭한다.
그런데 최근 넷플릭스가 지원해 제작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인 [알람브라의 추억]이 중세 스페인과 현대 한국을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을 이용해 멋지게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알람브라의 추억”은 원래 스페인의 작곡가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1896년에 작곡한 기타음악이다. 이 음악에서 타레가는 스페인적 요소와 이슬람 음악을 혼합해서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낭만적인 기타음악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바로 그 [알람브라의 추억]의 기타 곡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동명제목의 한국 드라마가 중세 스페인의 그라나다와 현대 한국 서울, 그리고 현실과 환상(증강현실)을 잘 연결하고 있다.
[알람브라의 추억]은 서울에 있는 제이 원 홀딩스라는 스마트 콘택트렌즈 전문 게임업체 대표인 유진우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정세주로부터 증강현실을 이용한 놀라운 컴퓨터 게임을 발명했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증강현실은 컴퓨터를 이용해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바람직한 현실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게임의 권리를 사기 위해 진우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에 내려간다. 세주의 지시대로 그라나다의 한국인 호스텔에 투숙한 진우는 호스텔 주인이자 세주의 누나인 희주를 만나지만, 정작 세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 체류하면서 진우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거리에서 중세 이슬람 전사들의 습격을 받는데, 게임과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진우의 라이벌인 차현석도 그 증강현실 게임의 판권을 사기 위해 스페인에 오게 되고, 진우와 만나 두 사람은 게임 속에서 대결하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컴퓨터 게임의 오류로 게임 속에서 진우에게 죽임을 당한 현석이 현실에서도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 후, [알람브라의 추억] 음악이 들리고 천둥이 치면 피를 흘리는 현석이 칼을 들고 나타나 진우를 죽이려고 한다. 진우는 현실과 게임이 구분이 안 되는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점점 더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진우는 미국으로 도피해 보지만 거기서도 현석은 계속 나타난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진우는 고난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장 높은 레벨인 마스터가 된다. 그리고는 세주가 누나 희주의 모습을 게임 속에 만들어 넣은 캐랙터인 엠마의 도움으로 게임의 문제점을 바로 잡게 되고, 그 이후, 현석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진우는 증강현실 게임 속에 갇히게 된다. 언제인가 시즌 2가 제작되면, 진우는 다시 현실로 나오게 될 것이다.
[알람브라의 추억]은 스릴을 즐기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선 알람브라 궁전의 상징이 중요하다. 알람브라 궁전은 원래 이슬람 궁전이었지만, 1492년 스페인의 크리스천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이후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의 궁전이 되었다. 이후, 알람브라 궁전은 나스리드 안달루시아 이슬람 건축과 기독교 건축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명소가 되었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로 인해 정치적, 종교적 적이었지만, 스페인의 이슬람과 기독교는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화해와 공존을 추구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서 한국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에서건 게임 속에서건 모두 증오와 원한과 복수에 사로잡혀 있다. 예컨대 현석은 죽었지만, 끈질기게 살아 돌아와서 게임 속에서건 현실에서건 무조건 진우를 죽이려고 한다. 아무리 수없이 현석을 죽여 봐도 현석은 다시 살아 돌아와서 진우에게 복수를 시도한다. 권력다툼, 의리 배신, 돈, 질투, 라이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어두운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세 스페인의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과는 달리, 이 드라마의 한국인 등장인물들은 서로 공존하거나 화해하지 못하고, 끝없는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탄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이처럼 서로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복수하는 파벌싸움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나라를 망치고 있는 이러한 두 진영의 양극화가 만들어내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드라마 [알람브라의 추억에서처럼, 한국사회도 복수심에 불타는 과거의 유령이 끈질기게 찾아와 우리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피 흘리는 과거의 유령을 하루속히 삭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어두운 과거의 게임과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한국 드라마에서는 [알람브라의 추억] 음악이 배경으로 흘러나올 때마다 복수심에 불타는 과거의 유령이 출몰한다. 그러나 [알람브라의 추억] 음악은 이슬람 음악과 스페인 음악의 혼합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사랑의 음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람브라의 음악과 궁전으로부터 증오심과 복수심을 극복하고 서로 화해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알람브라의 추억은 즐겁고 달콤해야지, 무섭거나 악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맨스에서 복수로: K-드라마의 최근 변화]
한류는 원래 [겨울 소나타]나 [대장금] 같은 로맨틱 드라마나 역사 드라마로 시작되었다. 그런 초기 한류 드라마에서는 온갖 장애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봉에 이르는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 드라마들은 한국을 외국 시청자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낭만적이고 역사적인 곳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최근 한류 드라마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로맨틱 드라마나 역사 드라마를 벗어나, 요즘은 복수 드라마가 국내외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리]나 [이브]나 [3인칭 복수]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과거에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한 복수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의 복수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학교폭력에 대한 복수극이다. 예컨대 [글로리]에서도 여주인공은 과거에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에 대해 복수한다. 그녀는 그 사람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의 담임 교사가 되어 복수한다. [3인칭 복수]에서는 운동부 여고생이 자기 남동생의 최근자살을 조사하게 위해 동생의 학교로 전학을 간다. 거기서 남동생의 죽음이 학폭 가해자들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복수를 시작한다.
때로 복수극은 자기 가족의 죽음을 초래해서 가정을 망친 권력자에 대한 복수도 다룬다. [이브]에서는 여주인공이 재벌에 의한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복수를 맹세한다. 그녀는 무려 13년을 기다리다가,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남자와 불륜을 벌인 다음, 그가 천문학적인 이혼소송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그를 파산시킨다.
그런데 그런 복수 드라마는 자칫 한국의 이미지를 복수와 원한의 나라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사실과는 다르게 한국을 학교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방문하기에 덜 매력적인 곳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복수극의 등장과 인기의 배경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회정의 부재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부자와 특권층에 대한 분노를 부채질하는 좌파 정치인들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
물론 한국의 학교에서 학폭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있다. 학교 당국은 학폭의 가해자들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는다. 학폭은 약자를 괴롭혀서도 나쁘지만, 피해자의 가슴에 영원히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나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학폭을 근절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피해자들은 당국이나 사법체계를 불신하게 되고 개인적인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수 드라마는 카타르시스가 되기 때문에, 복수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런 복수극은 자칫 우리가 개인적으로 복수를 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법치국가에서 살기 때문에, 개인적 복수의 윤리성과, 개인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의 문제점을 성찰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유혈 복수극이 융성하고 관객들이 환호하는 자코비언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특징은 과거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관용과 관대함이다.
복수극의 융성이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는 관객들로 하여금 과거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복수의 판타지는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과거의 불행을 반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문제는 과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에서 길을 잃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데 있다. 한 나라도 과거사에만 매달리면 암울하고 어두운 미래만 기다리고 있게 된다. 플라톤은, 과거사 정리의 강박관념에 매달리면 결국 독재국가로 가게 된다고 경고했다.
복수는 복수를 초래한다.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면, 그 사람의 자녀들이 당신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수는 끝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복수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된다. 복수가 삶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복수로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짧다.
누군가는 한국인의 특징이 ‘정“과 ”한“이러고 한다. 정은 ”affection“이겠지만, ”한“은 영어로 번역이 어렵다. ”Grudge“나 ”resentment“로는 ”한“을 제대로 나타내기 어렵다. 어쨌든, ”한“은 이제 그만 극복해야 한다. 이제는 한국도 부유한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가난한 약소국일 때의 국민정서인 ”한“을 갖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의 복수극들이 관객들에게 ”잊고 용서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바란다. “최상의 복수는 당신의 적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성곤
1994년에 [김성곤교수의 영화에세이]를 출간한 이래, [문학과 영화], [헐리웃: 20세기 문화의 거울], [김성곤의 영화기행], [영화로 보는 미국], [영화 속 문화 읽기]를 출간했다. [김성곤교수의 영화에세이]는 충무로 영화아카데미 교재이며, 조선일보가 뽑은 영화관련 도서 100권 중 1위로 뽑혔고, TvN에서 신기주 작가에 위해 “지적 욕구에 목말랐던 시절, 갈증을 해소해준 단 한권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영화에세이]는 2017년에 [처음 만나는 영화]라는 제목으로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같은 해에 한국 문학평론가협회가 발표한 [한국 근현대 대표평론가 50인]에 선정되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의 전당, 서울대학교 발전기금 명예의 전당, 그리고 행정안전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