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꿈과 악몽

레인 맨 / 김성곤

 

레인 맨-사라진 미국의 꿈

 

톰 크루즈와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레인 맨Rain Man 1988은 세계의 많은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은 탁월한 수작이다. 하지만 레인 맨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자폐증 환자 역을 맡은 더스틴 호프만의 완벽한 연기에 감탄하면서, 이 영화를 형제간의 우애 또는 자폐증 환자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친다. 과연 레인 맨에 대한 화제는 온통 자폐증 환자의 연기를 잘 해낸 더스틴 호프만에 대한 것뿐이고 아카데미상 역시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레인 맨의 중요성은 단순히 형제간의 우애나 자폐증 환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레인 맨의 진짜 중요성은 그것이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20세기 인류 문명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는 데 있다. 그와 같이 무거운 주제를 배경으로 깔고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사실은 모든 초점이 자폐증 환자인 형이 아니라 정상인인 동생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생 톰 크루즈의 깨달음과 눈뜸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고, 형 터스틴 호프만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는 하나의 상징인 텍스트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영화의 매 장면 하나하나는 심오한 의미를 갖고 새롭게 다가온다,

레인 맨은 우선 미국의 꿈의 성취와 좌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원래 유럽의 기계문명과 산업화, 종교 박해를 피해 대 자연을 찾아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초원의 집으로 표상되는 녹색의 정원과 목가적인 삶은 곧 초창기 미국인들이 추구했던 미국의 꿈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곧 북미 대륙의 대자연을 개척해 문명화시켰고 산업화시켰으며, 그 결과 미국은 오늘날 세계 문명과 과학의 중심지가 되는 패러독스를 보여 주게 되었다. 더구나 많은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의 금광으로 몰려가게 만들었던 1849년의 골드러시는 미국의 꿈을 물질적인 성공과 동일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나마 남은 서부의 미개척지마저도 급속도로 문명화시키는데 공헌했다.

1890년 미국 정부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다고 공식 선언함으로써, 미국 서부 개척사의 종말과 순수한 미국의 꿈과 죽음을 선포했다. 녹색의 목가적 꿈은 물질주의와 산업주의에 의해 오염되었고 초기의 순수했던 미국 꿈은 어느덧 타락한 미국의 악몽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작가들은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그동안 상실해 온 것이 무엇인가를 작품 속에서 부단히 탐색해 왔다. 예컨대 녹색의 불빛을 되찾으려다가 녹색의 실내수영장에서 살해당하는 순진한 미국인의 이야기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나, 어린 시절 송어가 뛰놀았던 녹색의 하전을 피트당 잘라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미국의 송어 낚시의 저자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바로 그러한 계열의 대표적 작가들이다. 그들은 모두 경제발전과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볼 것을 제안한다.

 

자동차와 장미 정원-미국의 유산

 

영화 레인 맨의 주인공 찰스 배비트(톰크르즈 )는 서부로 이주해와서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상실한 미국인의 전형이다. 그는 마치 골드러시 때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온 사람처럼 돈과 금속의 노예가 되어 나날을 살고 있다. 자동차 판매인인 그의 인생은 온통 돈과 기계-예컨대 전화와 자동차-에 매달려 있을 뿐, 그의 삶에 녹색의 정원이나 목가적인 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그는 자동차(기계)를 타고 가다가 카 폰(기계)으로 부친 샌포드 배비드의 죽음을 통고받는다. 주인공이 갑자기 소환장을 받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포의 어셔가의 몰락이래 토머스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모티브다. 부친의 장례식에 초대를 받고 찰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비록 부친과의 사이가 나빠서 일찍 집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재정난을 겪고 있는 그에게 부친의 유산은 너무나 유혹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독자로서 유산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래서 그는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다시 자신의 근원인 동부로 돌아간다.

그러나 고향인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돌아간 그는 부친이 자신에게는 단 한 푼의 돈도 물려주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모든 재산은 어느 요양 기관에 기증이 되었고, 부친이 그에게 물려준 것이라고는 단 두 가지-자동차와 장미 정원-뿐이었다. 분노와 허탈에 빠진 찰스는 부친이 물려준 이 두 가지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가지야말로 미국인들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두 가지의 유산-즉 기계와 정원 또는 산업주의와 전원주의-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찰스가 일찍부터 선택했던 것은 물론 기계와 물질주의, 곧 변절되고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선택의 부작용을 우려한 부친과의 충돌과 갈등을 의미했다. 과연 그는 어렸을 때 타지 못하게 금지된 부친의 뷰익 자동차(미국의 중산층들이 즐겨 타는 GM 자동차) 타고 나갔다가 부친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결국에는 그 사건으로 인해 집을 뛰쳐나가 서부로 가게 된다.(부자지간의 갈등은 미국 문학이 즐겨 다루는 또 하나의 주요 모티브다.)

그런데 부친은 이제 그에게 그 문제의 자동차와 장미 정원만을 유산으로 남겨 주고 떠나 버린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찰스는 부친이 물려준 차를 타고 부친의 전 재산이 기증된 요양원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어느 자폐증 환자를 만나고 그가 바로 자신의 감추어진 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까지 두 형제를 서로 만나게 해 주는 매개체가 부친의 자동차라는 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동생은 요양원 측을 협박해 부친의 유산을 돌려받을 욕심으로 형을 납치한다. 그래서 그는 형을 캘리포니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 형 레이먼드야말로 부친이 자신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

 

2대륙횡단여행

 

이 영화의 핵심적인 사건은 바로 자폐증 환자인 형 레이먼드 배비트(더스틴 호프만)가 비행기 타기를 거부해, 부득이 두 형제가 부친이 물려준 자동차로 미 대륙을 횡단하면서 일어난다. 즉 이러한 상황 설정으로 말미암아, 찰스는 예전에는 멋모르고 혼자 횡단했던 대륙을 이제는 형과 함께 부친의 차를 타고 다시 한 번 되짚어 가 보는 2의 서부 개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비트 작가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처럼 미국과 미국인의 재발견을 위한 정신적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인 과거로의 여행, 과거에서 다기 현재로 되돌아오면서 잘못의 근원을 발견하는 미래로의 여행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백 투어 퓨처Back to the Future시리즈 역시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 경우 과거는 향수의 대상이 아닌 조사와 심문의 대상이 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에서는 현재의 잘못된 상황의 근원 또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간 다음(찰스 역시 현재 재정적 인간적 문제를 안고 있고, 그것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자신의 은원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과정-미셀 푸코가 반기억counter-memory이라고 부른 과정-을 통해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그 2의 대륙 횡단(또는 2의 골드러시‘-형은 곧 돈이고 그는 지금 서둘러 서부로 달려가고 있으니까)’을 통한 주인공의 깨달음과 눈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실은 부친이 그에게 물려준 진정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출발해 현재로 되돌아오는 그 미래로의 여행을 통해 찰스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즉 그는 제2의 서부여행을 통해 첫 번째 여행에서는 미처 몰랐던 거들- 예전에 어렸을 때 왜 부친이 자동차를 타지 못하게 했는가, 왜 지금은 그 자동차와 장미 정원을, 그리고 자폐증 환자인 형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는가 하는 것들-의 심오한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는 여행을 통해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던 형의 자폐증 속에 사실은 비상한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오직 기계적이고 경제적인 인간관계밖에 몰랐던 그도 이제는 다른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어렸을 적 레인 맨이 자장가를 불러준 것을 기억하는데, 그것은 사실 레이먼드라는 형의 이름을 자신이 혼동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는 비로소 레인 맨이 자신의 삭막한 가슴에 다시 한 번 재생과 풍요의 비를 가져다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서 레인 맨은 미국인들이 물질적 성공(기계)만을 추구하느라 너무나 오랫동안 요양기관에 유폐시켜 온, 그래서 이제는 그 존재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과연 찰스는 형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목가적 꿈녹색의 정원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레인 맨은 이제 자폐증 환자가 되었고, 밀폐된 곳에서 TV 프로그램에 중독된채 살아가고 있는 레이먼드가 되었다. 그가 꼭 봐야 된다고 주장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위험을 의미하는 퀴즈 게임 제포디Jeopardy라는 것 역시 대단히 시사적이다. 과연 기계문명과 물질주의의 추구는 지금 위험에 처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인 맨밖에 없다.(그는 모든 퀴즈의 답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레인 맨마저도 지금은 요양 기관에 감금된 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요양기관을 벗어난 레인 맨은 동생 찰스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 준다. 그는 비가 오는 날에는 여행을 거부한다. 그것은 아마도 비가 오는 날에는 굳이 레인 맨이 여행의 동반자가 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재생을 가져오지 못하는 현대의 죽음의 비가 싫어서일 수도 있겠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에 들른다. 이 장면은 물론 이 영화의 재미를 위한 양념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라스베이거스가 여행의 종착지 직전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예컨대 여행을 끝내기 전 상징적으로 어떤 입문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라스베이거스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기계주의와 한탕주의의 정점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를 수놓은 화려한 네온사인은 마치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정점을 이루는 나이트 타운 에피소드에서처럼 한밤중 마녀의 강력한 유혹을 상징한다. 오랜 방황 끝에 마녀의 유혹을 이기고 드디어 서로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스티븐 디달러스와 리오폴드 블롬처럼, 찰스 배비드의 레인 맨도 라스베이거스의 유혹을 이기고, 진정으로 서로 화합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마녀(라스베이거스)의 유혹은 피해 가거나 지나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그것과 대면해서 이겨야만 한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극적인 화합 속에서 집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라스베이거스 장면에서 벌어지는 것은 기계와 인간의 한판 승부다. 온갖 정교한 기계들과 상업주의와 물질주의 앞에 두 형제는 과감히 도전한다, 물론 그와 같은 도전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두 형제가 마음을 합했을 때만 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왜 게임 중 형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혼자 기계와 대면했을 때에는 패배하는가 하는 이유일 것이다. 동생의 테크닉과 형의 비상한 기억력(기계의 힘이 아닌 인간의 능력)으로 두 형제는 게임에서 돈을 딴다, 이는 인간과 기계, 또는 진짜 녹색(초원)과 가짜 녹색()과의 대결에서 보여 주는 통쾌한 전자의 승리이다. 물론 여기에서 딴 돈은 동생 찰스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이중의 기쁨을 제공한다. 결국, 부친은 방탕한 아들 찰스의 문제를 자신의 위대한 유산으로 깨끗이 해결해 준 것이다.

 

레인 맨-되찾은 아메리칸 드림

 

드디어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태어난 찰스는 재정적인 문제(경제관계)와 애인과의 문제(인간관계)를 둘 다 해결하고, 이제는 다만 레인 맨과 같이 살기만을 원한다. 그는 상당액의 돈을 줄 테니 레인 맨을 돌려 달라는 요양 기관 측의 제의도 거절하고 형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레인 맨은 요양 기관으로 돌아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모든 것을 깨달은 톰 크루즈에게 그를 깨우쳐 주었던 텍스트는 꼭 같이 있지 않아도 되었는지도 모른다.

레인 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뜨거운 물건이었다. 그는 뜨거운 물 때문에 요양기관으로 쫓겨갔고, 또 나중에는 과열된 토스터(기계)에서 난 불로 인해 소동을 피운다, 그것은 어쩌면 뜨거운 불을 꺼서 우리의 화상을 막아줄 수 있는 시원한 비를 상실한 현대의 레인 맨의 모습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어가는 녹색의 초원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자연의 뿐이다 그것이 왜 찰스가 레인 맨을 자기 옆에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가 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레인 맨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지만 찰스는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찰스는 맹목적인 물질적 성공의 추구 대신, 한때 잃어버렸던 녹색의 꿈을 다시 되찾음으로써 미국의 악몽 대신 다시 한 번 순수한 미국의 꿈을 꾸게 된다.

찰스는 미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의 하나이다. 이는 곧 그가 모든 미국인을 대표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상징적인 것은 그의 성이 배비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강작가인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배비드의 주인공 조지 배비드는 바로 레인 맨의 찰스 배비드처럼, 물질적인 성공을 미국의 꿈으로 착각해서 실패한 미국 중산층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현대 미국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서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단 미국의 이야기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국처럼 경제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나라에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난 60년대 이래 물질적 성공을 위해 정신적인 전원의 꿈을 파괴해 왔고, 산업의 발달을 위해 실제로 녹색의 정원들을 훼손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멈춰 서서, 그와 같은 과정에서 과연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스스로 돌이켜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요양 기관에 유폐시켜 온 레인 맨을 찾아내어 고갈되고 황폐해진 우리 마음의 황무지에 다시 한 번 재생과 풍요의 비가 내리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원의 목가나 녹색의 꿈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망각하고 물신주의와 기계주의만을 숭배하고 맹신할 때, 우리는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스스로 죽음의 시간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 녹색의 꿈과 생명의 비를 상실하면 정신적·신체적 황폐와 피폐로 인해 지구의 파괴와 인류의 파멸이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인 맨의 발견과 녹색의 회복, 그리고 리오 마르크스의 책 제목처럼, ‘정원 속의 기계와 조화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친의 뜻을 배반하고 녹색의 꿈을 상실한 우리에게 레인 맨이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