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강의
한국문학의 번역과 해외출판
김성곤(서울대 명예교수/ 전 조지 워싱턴대 초빙 석학교수)
원작과 번역의 관계
사물의 중심해체와 경계소멸, 그리고 절대적 진리의 유효성 상실을 주창하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번역학 Translation Studies’이라는 새로운 이론의 부상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동안 중심이자 오리진이며 절대적 진리로 군림했던 원작의 그늘에 가려져 늘 주변부에만 머물고 있던 ‘번역’이 새롭게 부상한 포스트모던 인식에 힙 입어, 이제는 양지로 나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최근 영국의 <더 타임스>지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논하면서, “양지로 나와 빛나기 시작한 한국문학과 번역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에게 축하를 보낸다.“라고 말한 것도 이제는 한국의 번역문학이 주변부에서 나와 중심부로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번역은 오랫동안 원작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고, 번역자는 반역자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번역의 유효성을 의심하며, “시는 번역하면 사라진다. Poetry is what gets lost in translation”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또 영국 저술가 새뮤얼 존슨은 “시는 번역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는 원어로 읽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어로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이 프로스트나 존슨의 언급은 번역을 원작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번역이 원작보다 열등한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장미의 이름]의 서문에서 에코는 자신의 소설이 번역이며, 그것도 삼중번역이라고 말한다. 즉 14세기 말 독일의 수도승 아드소가 라틴어로 쓴 것을 19세기에 프랑스 수도승이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그 프랑스 번역본을 자기가 이태리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에코가 이렇게 자신의 창작을 굳이 번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원작도 사실은 다른 것의 번역일 수 있으며, 번역도 원작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에코는 우리의 일상생활도 여러 가지 형태의 번역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부부나 친구나 직장인들도 모두 서로의 표정이나 제스처나 억양을 통해 상대방을 마음을 읽어내는데, 그것도 사실은 일종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번역학자인 데이빗 벨로스 교수도, “우리는 늘 번역을 하면서 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번역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언어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에코는 더 나아가, 문자 텍스트 뿐 아니라 음악이나 무용이나 미술도 사실은 번역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마음에 전달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들이 외국 것일 때에는 더욱 복합적인 문화적 번역을 거쳐서 자국인에게 전달된다. 예컨대 외국문학을 읽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적 번역을 거쳐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에코에 의하면, 번역은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삶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한 이론과 주장을 통해 에코는 번역이 원작과 동등한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프로스트나 존슨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 만일 번역이 없다면, 우리는 애초에 좋은 외국시를 읽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멋진 번역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원작에 버금가는 감동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예전에는 한국인들의 애송시였고, 한국의 이발관에도 걸려 있었던 푸쉬킨의 시, [삶]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법이다. (중략)
사실 푸쉬킨의 위 시의 영어번역에는 위 번역이 주는 감동이 없다. 그래서 [삶]의 경우는, 뛰어난 번역을 하면 번역시도 원작 시 만큼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번역은 결코 열등하거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원작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W. B.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수]도 감동적인 번역으로 읽을 수 있는 시다.
일어나서 지금 가자, 이니스프리로 가자
거기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오두막 짓고
아홉 줄 콩 심고 꿀벌 키우며
벌들 웅웅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거기엔 다소간 평화가 있겠지.
아침의 베일 속에 귀뚜라미 우는 풀잎으로 떨어지는 이슬처럼
평화는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기에.
거기서 밤은 은은히 빛나고, 낮은 자주 빛으로 불타오르며
저녁에는 온통 홍방울새 나래소리 (중략)
또는 에밀리 디킨슨의 [내 벗을 차마 어찌 떠나랴]도 원작의 향취와 분위기를 살리는 번역이 가능하다. 필자는 디킨슨의 시를 다음과 같이 번역해보았다.
내 벗을 차마 어찌 떠나랴
만일 내가 떠난 사이에 그가 죽는다면
나를 원했던 그의 가슴에
나는 너무 늦게 도달하게 되리니,
내가 만일 그의 눈을 실망시킨다면
그렇게도 나를 보고 싶어 하던
나를 보기 전엔—나를 보기 전엔
차마 감지 못하던 그의 눈을 실망시켜야만 한다면
내가 틀림없이 오리라고, 오리라고 믿고
내 발소리가 들릴까 귀 기울이다가, 귀 기울이다가
더디 오는 내 이름을 부르다가 눈을 감은
그의 소중한 믿음을 배반해야만 한다면
내 가슴은 차라리 그 전에 터져버려라.
왜냐하면 그 후에 터지는 것은
간밤에 서리 내린 곳을 비추는
다음 날 아침 햇살처럼 헛된 일이기에.
또한 1960년대에 번역되었던 제임스 조이스의 [애라비 Araby]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또는 하퍼 리의 [아이들은 알고 있다 To Kill a Mockingbird] 같은 작품들은 번역으로 읽어도 너무나 감동적인 작품들이었다. 비록 당시에는 우리 번역서의 대부분이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이었고 일본어 번역본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좋은 번역은 원작의 향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좋은 번역이란 어떤 것인가?
좋은 번역가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탁월한 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문장력이 뛰어나야 하며, 셋째는 원작의 언어 source language와 번역어 target language, 그리고 두 나라의 문화에 모두 통달해 있어야만 한다. 우선 문학적 감성이 없는 번역가는 예술적 정교함과 정치한 표현을 제대로 번역해내기 어렵고, 문장력이 탁월하지 않는 사람은 원작을 세련되고 멋진 문장으로 옮기기 어렵다. 그리고 두 언어가 모국어 수준이 아니거나, 두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르면 멋지고 좋은 번역을 할 수가 없다. 우선 언어가 유창하지 않으면 현지인들에게 호소력 있는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문화를 모르면 필연적으로 오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부설 교육기관인 [번역아카데미]의 스페인어 교수이자 남미 콜롬비아 작가인 안드레스 펠리페 솔라노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가는 원작자의 문학세계를 잘 알고 그걸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마치 집을 허문 다음, 자재를 싣고 바다를 건너서 다른 해안에다가 똑같은 복사본이 아닌, 원래 집을 생각나게 하는 새집을 다시 짓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번역가가 새로 지은 집은 새로운 토양에 맞는 것이 중요하지, 원래 집과 똑같을 수도 없고, 똑같을 필요도 없다. 솔라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번역가는 마치 여러 달 동안 자기를 기다려준 애인의 편지를 읽는 병사의 애정과 열정으로 작품을 사랑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신이 발견한 방정식을 푸는 물리학자처럼 그 작품에 몰입해야하며, 마지막으로는 원작에서 울려나오는 리듬과 멜로디를 음악가의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번역가는 원작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원작을 사랑해야 하며, 번역에 몰입해 전념하고, 원작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는 것이다. 영국 소설가 앤소니 버제스의 말대로,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왜 중요하며, 어떤 번역가가 바람직한가? 이태리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번역이 없었다면, 나는 우리나라 국경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번역은 내 최고의 우방이었고, 나를 세계에 소개시켜주었다.”고 말했다. 칼비노에 의하면, 작가는 국내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번역가는 그 작품을 세계로 내보내는 사람이다. 또한 번역가는 나라와 나라, 그리고 문화와 문화 사이에 이해와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번역가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하거나 폄하할 수 없다. 미국의 번역문학서 전문 출판사인 달키 아카이브 프레스 Dalkey Archive Press의 존 오브라이언 대표는 “좋은 번역가는 능력이 있고, 언어감각이 뛰어나며, 과감하고 문화적으로도 박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원어민 번역가와 한국인 번역가 중 누가 더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번역가는 두 언어를 다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두 나라의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원어민 번역가의 경우에는 번역어는 자연스럽겠지만, 한국문화를 잘 몰라서 생기는 오역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반면, 한국인 번역가는 한국문화는 잘 알겠지만, 외국어 문장이 부자연스러워 현지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원어민과 한국인의 협업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번역서 전문 출판인으로 잘 알려진 존 오브라이언은 흔히 번역은 원어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30년 동안의 내 경험에 의하면, 최고의 번역가는 괜히 고집만 센 원어민이 아니라, 영어를 잘하는 원작언어 국가의 번역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들은 원어민 번역가가 놓치는 원작의 의미나 음조나 암시를 잘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영어표현은 출판사 편집인이 고쳐주면 해결되었다.”
또 프린스턴대학교의 데이빗 벨로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영어로 번역된 프랑스 추리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완벽한 미국영어나 속어로 대화를 하면 좀 이상할 것이다. 독자들이 프랑스식 표현이나 프랑스식 영어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인 번역가보다 영어를 잘 하는 프랑스인 번역가가 더 적절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상한 아시아작가들의 번역가는 모두 그 나라 언어와 문학의 전문가인 원어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어민 전문번역가의 양성이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번역한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 Deborah Smith같은 뛰어난 번역가는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필수적인 소중한 인적 자산이다. 스미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멋지게 번역해 일본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을 가져다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스미스는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런던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다.
번역은 마치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로스 브릿지처럼, 각기 다른 언어와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해주는 소중한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문학의 해외출판
한국문학을 해외에 알리는데 필수적인 것은 첫째, 훌륭한 원작, 둘째, 탁월한 번역가, 그리고 셋째 유능한 해외출판사이다. 그런데 아무리 원작이 좋고 번역이 좋아도 좋은 해외 출판사를 찾지 못하면 전혀 알려지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무능한 출판사는 출판지원금만 받아서 책을 출간하기만 하고 전혀 홍보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책의 생명은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능한 출판사는 책이 나오면 언론과 저널에 리뷰도 싣고 작가를 초청해 강연과 저자 싸인회 등의 출판기념 행사를 해서 작품을 널리 홍보한다.
필자가 문체부 한국 문학번역원장 시절에 처음으로 “펭귄 클래식” 시어리스에 홍길동전을 출판한 펭귄 출판사나, 김영하 작가의 작품 세 개를 출간한 호튼 미플린 하트코트 출판사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한 알프레드 크노프 같은 유명 출판사는 물론 책이 나오면 뉴욕타임스 북 리뷰 같은 유명 언론에 서평을 싣고 판촉을 활발하게 한다. 다만 문제는, 그런 대형 상업 출판사는 판매 가능성이 크지 않은 순수문학은 출간을 꺼린다는 데 있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작은 출판사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으면, 작품의 출간을 널리 알릴 수가 있다. 예컨대, 달키 아카이브 프레스는 대형출판사는 아니지만, 번역 전문출판사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데, 한국 문학번역원 지원으로 [한국문학전집] 25권을 출간한 후, 컬럼비아대학교 출판부와 협약을 맺고 활발한 홍보를 통해 한국문학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면 해외출판사에서는 어떤 작품을 선호하는가? 북 에이전트인 트레이시 피셔 Tracy Fisher는, “한국문학이 미국출판계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추리 기법을 차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독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추리기법의 소설이 성공하면, 진지한 기법의 소설들도 뒤따라 와서 쉽게 출판사를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과연, 미국에서 출간되어 주목을 받고 성공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Please Look After Mom]나 김영하의 [빛의 제국 The Republic is Calling You], 편혜영의 [홀 Hole], 정유정의 [종의 기원 My Good Son]은 모두 순수문학이지만 뛰어난 추리기법을 차용한 소설들이다.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은 한류의 세계적인 인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예전에 사이의 [강남스타일]이 인기일 때, 어느 외국인은 “만일 이때 사이의 [전기]가 나오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텐데.”하고 개탄했다. 지금도 BTS의 전기나 BTS 관련 소설, 혹은 K-Pop과 연관된 작품이 나오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영국의 [더 타임스] 리터라리 서플리먼트는 “빛나는 한국 Glittering Korea”이라는 제목으로 한국문학의 해외 부상과 국제적 인정에 대해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북한은 미사일 실험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지만, 한국은 세련된 문학과 문화로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라고 썼다. 한강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수상한 영국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노벨상과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데, 금년에는 천명관 작가의 [고래 Whale]가 최종후보로 올랐다. 한국문학은 앞으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는 세계문학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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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6년 동안 문체부 한국 문학번역원장을 지냈으며, 재임 중에 한강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채식주의자]로 영국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으며, 번역서 전문 출판사인 미국 Darkey Archive Press에서 한국문학전집 25권을 출간하는 등,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했다. 한국출판문화협회의 기관지인 [출판문화]에 의해 “한국을 대표하는 번역가”에 선정되었고, 김영사(비채)에 의해 “우리 시대 최고의 번역가” 중 한 사람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최인훈의 [광장], 황동규의 [미시령 큰바람](미국시인 데니스 멀로니와 공역), 문정희의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영국시인 알렉 고든과 공역)를 영역해서 미국에서 출간했으며, 영국에서는 이어령 교수와 공저로 Simple Etiquette in Korea를 발간했다. 영문 문학지 Korean Literature Today의 발행인 및 마크 피터슨 브리검 영대 명예교수와 함께 유네스코 한국지부 기관지인 Korea Journal의 공동 편집장을 지냈고, 월간 [문학사상] 주간과 계간 [외국문학] 책임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고 김윤식 교수 및 이청준 작가와 함께 계간 [21세기 문학]을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