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만한 이유

 

                                                                                                                     박 유니스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 사는 동생의 LA 방문에 맞춰 이곳에 사는 네 자매가 모두 시간을 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라도 차 점검은 철저히 했다. 두 형부와 두 제부의 보이지 않는 염려의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행 중에는 누구도 못 따라갈 ‘백시트 드라이버(backseat driver, 운전할 때 옆에서 잔소리하는 사람)’가 한 분 계신다. 서열상 그분의 자리가 운전하는 내 옆자리라서 더 신경이 쓰인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주무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운전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간섭은 로컬 길에서부터 시작됐다. 좌우 회전은 말할 것도 없고 프리웨이를 타기 위해 차선을 바꿔야 할 시점까지 지시한다. 깜빡이를 일찍 켜도, 조금 늦게 켜도 한 소리 듣는다. 수시로 속도계를 확인하다가 바늘이 조금만 넘어가도 그 즉시 티켓 감이라며 왕창 감점한다. 

 

가스를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어갔다. 내 차의 가스탱크는 차의 오른쪽 후미에 있는데 그분이 어찌나 확신에 찬 어조로 명령하는지 차주인 내가 그만 왼쪽 가스 펌프에 차를 대고 말았다. 뒷자리에 앉은 동생들이 뒤로 넘어갔다.

 

남의 차에 편승할 때는 누구나 조금은 불안하다. 하지만 그렇게 일일이 좌우를 살피며 운행에 끼어들면 운전자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오히려 안전 운행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백시트 드라이버란 말도 생겨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처음 운전을 배우던 때가 떠오른다.

노동절 연휴에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의 학교가 있는 도시로 갔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국 중부 소도시의 가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남편은 학위 준비로 늘 바빴다. 그가 차를 갖고 나가면 나는 낯선 도시에서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부근의 텅 빈 주차장으로 차를 몰더니 내게 핸들을 넘겼다. 그렇게 매일 밤 운전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는 내가 프리웨이를 오갈 정도로 운전에 익숙해질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서툰 솜씨로 후진할 때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내게 맡겼다. 자신이 운전 중일 때, 옆의 차가 끼어들거나 급히 추월해도 화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는 늘 그렇게 말했다.

페미니스트인 그는 여성 운전자에게는 더욱 관대했다. 그녀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프랑스의 치즈 가짓수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프리웨이를 달리는 중이었다. 어스름 녘에 장대비 속에서 시야도 좋지 않았다. 갑자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급히 속력을 줄였지만, 차는 눈 깜빡할 사이에 건너편 차선까지 미끄러졌다. 너무 놀라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의 입에서 품위 없는 한마디가 튀어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침묵했다. 오래전 일이다. 삼십 대 후반이었던 나는 그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심지어 위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나고 보니 상대의 약점을 덮어주고 자존심을 늘 세워주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물며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배려의 마음도 연습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라면 이 경우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처신하려 했지만, 돌아보면 늘 자신이 없다. 살아갈수록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된다.

삶의 무대에서는 상황에 따라 주연과 관객의 역할이 따로 주어진다. 자신의 방식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무대에 오른 주연이 그 역할을 가장 능숙하게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역할이 조금 서툴더라도 타인의 노력과 한계를 인정하고 이해해 줄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출발할 때의 소란과 흥분이 가시고 나니 슬며시 졸음이 온다. 나의 운전을 살펴봐 준다던 백시트 드라이버도 어느새 꿈나라로 가 버렸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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