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레너드 우드의 햇살
박유니스
미주리 주립대학에 재직할 때였다.
학교에서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에 포트 레너드 우드(FT. Leonard Wood)가 있었다. 모병제인 미국에서 한국의 논산 훈련소 같은 곳이다. 공병과 신병들을 주로 맡아 훈련했고 10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치면 이어서 10주간의 전공별 군사교육을 이수한 뒤에 자대에 배치되어 떠난다.
어느 날 레너드 우드시의 DMV에서 학교의 추천을 받았다며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영어로 된 운전 면허 시험 문제지를 한국어로 번역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레너드 우드에서 근무하는 병사의 한국인 부인들이 면허 시험이 어려워 운전 면허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문제를 제출할까 한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우리가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신병들은 모든 훈련이 끝나면 20주 후에 떠나지만 그들의 교육을 맡은 교관들과 기초 훈련을 담당하는 조교들은 그곳에 상주한다. 그 외에 경계 근무 담당 초병들 그리고 급식, 세탁 관계 일 등, 많은 장교와 선임병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한인 여인과 결혼한 가정도 여럿 있다고 했다.
그곳의 한국인 부인들에 대한 평판은 그때 우리 학교의 한인 사이에선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 병영에 여러 나라의 여자들이 북적대니 싸움이 끊이질 않았는데, 일본과 베트남 부인들은 엠피(Military Police)가 나타나기만 해도 흩어지는데 한국 부인들은 호스로 물을 뿌려도 흩어지지 않아서 엠피들이 모두 손을 내 저으며 출동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시작됐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3년여 동안 그곳 부인들과는 참으로 따뜻한 교류를 나누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처를 받았다며 우리를 만나보고 싶다는 샌디 로버츠라는 부인을 만났다. Mrs. 로버츠는 품위가 있었고 영어에도 능통했다. 한국 이름이 김선희라는 그녀는 면허 시험 문제지의 한국어 번역을 조금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 생각에도 그 부분이 조금 미흡한 것 같아서 그녀의 의견대로 문구를 수정했다.
그날 선희 씨는 관사에 우리 부부를 초대해 밥 위에 농사지은 깻잎을 찌어 내어놓으며 극진히 대접했다. 텃밭에서 막 따온 오이는 여느 오이 맛과 달리 달디달았고 그 외에도 일 년에 몇 개밖에 열리지 않는다는 귀한 가지를 한사코 우리 차에 던져 넣어 주었다.
식사 후 Mr. 로버츠의 안내로 내외가 일군 텃밭을 돌아보고 우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텃밭에는 깻잎, 오이, 가지 외에도 고추, 상추, 쑥갓 등, 없는 것이 없었고 한쪽 구석에는 미나리꽝까지 있었다. 선희 씨에 의하면 부사관 부인들은 그렇게 야채를 키워서 생계에 보태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주말이면 나는 한국 학생 부인들을 차에 태우고 그곳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구입하러 가곤 했다. 우리가 가는 날은 그녀들은 번갈아 가며 자기들의 모빌 홈에 우리를 초대해서 따끈한 점심을 대접했다. 그때 우린 MJB 커피 깡통에 구멍을 뚫어서 옹색하게 콩나물을 길러 먹었는데 그녀들은 제법 큼직한 시루에 콩나물을 넉넉히 길러서 우리에게 맛깔스러운 콩나물밥도 대접했다.
그중에서도 제니는 유난히 정이 많았다. 경상도 출신인 제니는 모두들 공부하느라 욕본다며 채소 한 포기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했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장녀였던 그녀는 그때 남의 집 살이하러 떠나지 않고 K 여중만 갔더라도 자기 팔자가 달라졌을 거라며 자주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 학교를 졸업한 나는 마음속으로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녀는, "언니는 참 복도 많다. 우짜다가 한국 남편을 다 얻었노?" 하며 비명이 나올 정도로 내 어깨를 세게 내려치곤 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보조개가 귀여운 캐시는 낳아 준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지만 그녀는 남편 지미를 하늘처럼 여기며 행복한 삶을 꾸려 갈 희망을 늘 품고 있었다. 백인 남편을 가진 여자들은 자기를 무시하지만 지미는 자기만 사랑한다며 그윽한 눈길을 남편에게 보내곤 했다. 매달 캐시가 생리를 시작하는 날은 온 막사 안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그녀가 가구건 음식이건 되는 대로 집어 던지며 삼이웃이 떠나가게 통곡을 해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 갖기가 그토록 소원이었지만 과거의 험한 생활이 임신을 어렵게 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안타깝게도 캐시에겐 좋은 소식이 없었고 얼마 뒤 지미가 전역이 되어 함께 다른 부대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쯤 캐시가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모빌 홈 열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텃밭에는 햇볕이 따스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햇살처럼 따스하던 그녀들과 보냈던 시간이 바로 어제일인 듯하다.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나이가 들어 갈 수록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아요. 저도 캐시가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