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ryblossom.jpg

 

[LA중앙일보] 입력 2023.07.27 20:31

 

                               8학년들의 반란

 

포토맥강은 애팔래치아산맥에서 발원하여 워싱턴 DC를 돌아 대서양 연안의 체서피크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665km의 강이다. 주위에 운치 있는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이 많고 무엇보다 봄이 되면 강둑에 무리 지어 피는 벚꽃이 장관이다. 벚나무들은 강기슭에서 허리를 꺽어 닿을 듯 말 듯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중에서도 뭉게구름처럼 피는 분홍색 겹벚나무는 DC의 푸른 4월 하늘을 배경으로 환상적인 빛깔의 잔치를 펼친다.   

 

워싱턴 DC의 여러 언론 매체에서는 4월 초순 경부터 ‘올해의 벚꽂 만개일’을 예상해 발표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이르게는 3월 늦게 시작해서 거의 5월 초까지 벚꽃은 늘 그곳에 피어나고 매해 절정기는 4월 중순 전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굳이 복잡한 '만개일'에 맞추어 그곳을 방문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지니아 북쪽 소도시에 자리 잡은 딸의 신혼집을 늘 그 무렵에 찾았고 일정에 딸 가족과의 그날의 포토맥강 방문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으니 만개일의 소동에 나도 매해 일조하는 셈이었다.

 

그해도 4월이 되기를 기다려 DC로 향했다. 딸은 아이들과 함께 덜레스 공항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살 된 데이비드는 달려와 안겼고 두 살 된 앨리스는 유모차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나를 주시했다. 할머니라면 가까운 메릴랜드 집으로 자주 찾아 뵈는 그랜마가 있는데 또 하나의 그랜마라니. 나와 데이비드의 뜨거운 재회를 앨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보고 있었고 내가 유모차로 다가가자 마지못해 상체를 조금 기울여 주었다. 

 

첫 손주들이었던 두 아이를 사돈 내외는 많이 아꼈다. 주말마다 아들 가족을 집으로 불러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데이비드가 세발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 지칠 줄 모르고 타는 아이가 다칠세라 바깥사돈은 거의 두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 곁을 따라다녔다. 스윗하고 매사에 빠른 편인 데이비드에 비해 앨리스는 말도 조금 늦되고 상황을 늘 말없이 관찰하는 편이었다. 딸은 이 점이 마음에 쓰여 내게 걱정하곤 했는데 나는 차분한 앨리스가 오히려 사물에 대한 파악이 빠를 것이라 짐작했다. 

 

그해 가을 무렵, 딸네 집으로 전화했던 날이다. 전화기 옆에서 놀던 앨리스가 수화기를 들었고 내 목소리를 듣고 앨리스가 그랜마라고 하자 딸은 기대도 없이, “어느 그랜마?” 했는데 놀랍게도 앨리스는 “The one you love.”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받을 때 제 엄마가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하며 공손하게 응대하는 메릴랜드 할머니와  ‘하이, 맘’ 하며 심상하게 대답하는 캘리포니아 할머니. 그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차이를 예리한 앨리스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아득해 보이기만 하던 8학년 고지에 올라섰다. 얼떨결에 세월에 떠밀려 온 지점이어서 별다른 감회는 없었는데 여태 고분고분하던 몸이 반란을 시작했다. 먼저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창틀이 흔들렸다. 백내장 수술과 안검하수 수술을 받았다. 긴 세월 버텨 온 치아도 하나둘 어긋나기 시작해서 매달 치과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딸이 동행 했다. 아직 운전도 가능하고 백인 의료인들과의 의사소통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딸이 곁에 있으면 그들은 좀 더 친절했고 조금 더 상세히 내 증상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은 결혼 후 버지니아에서 계속 살았는데 연 전에 캘리포니아로 옮겨 왔다. 어느새 내 병원 진료일은 딸의 스케줄에 맞춰 정해지기 시작했고 딸은 시간을 내어 나와 병원에 오가는 날이 늘어 갔다.

 

이 무렵 딸의 가정에는 또 하나의 만만찮은 반란 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8학년이 된 앨리스의 변화였다. 그토록 유순하던 앨리스가 학교에 다녀오면 제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프리스쿨 때부터 가깝게 지내 온 친구들과 헤어지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새로운 학교생활에도 무난히 적응했는데 이즈음 부모의 모든 질문엔 퉁명스럽게 ‘노’로 일관했고 어디든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딸은 그럴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앨리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온 가족이 살얼음 위를 걷듯 앨리스의 기분을 살피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위는 통통한 딸의 볼을 한 번 만져보기 위해 미리 허락받고 어렵사리 딸의 볼에 간신히 손을 대보는 형편이었다. 

 

저녁마다 딸의 긴 하소연이 계속되었다. 그토록 감겨 오던 앨리스가 허그도 뽀뽀도 모두 거부하자 딸은 무척 상심했다. 나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예로 들며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딸을 위로했다.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4)의 ‘질량불변의 법칙’은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와 관계없이 같은 값을 유지한다’ 는 이론이다. 마찬가지로 자녀들의 일생 동안 GR의 총량은 일정해서 조금 일찍 시작하면 일찍 끝나고 어려서 별 탈없이 지나가면 다 커서 반드시 정해진 양만큼 그리고 더 고약하게 반항하게끔 되어있다는 ‘GR 총량 불변의 법칙’이다.

 

팔순 엄마의 병원 뒷바라지와 아이의 반항기가 겹쳐 딸은 힘들게 갱년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손녀가 생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닫히는 문 너머로 새롭게 열리고 있는 또 하나의 여성의 문. 노을 속으로 하나의 방이 스러지고 있을 때 하늘은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방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