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사

 

교회 뜰에 한 여름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차를 주차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 대 초반인 지인의 아들이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에 대한 부모의 남달랐던 기대를 아는 터라 위로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듯 젊은 죽음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식장에 들어서며 고인의 부모를 찾았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아들이 천국에 갔으므로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도 그들과 한가지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지, 그래도 애석하다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잃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일까, 신앙적인 위선일까, 극도의 슬픔과 고통으로 정상적인 사고의 기능이 마비라도 된 것일까? 

식이 시작되었다. 주례자는 오늘 예배의 모든 순서가 고인 부모의 요청으로 잔칫집의 분위기로 진행될 것임을 알렸다. 기도는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일찍 불러 가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이어졌고 설교는 죽음 뒤에 올 부활의 소망에 초점이 맞춰졌다. 천국 문에 다다르고 있을 그의 발걸음에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 활기찬 찬송을 끝으로 우리는 젊은 고인을 위한 천국환송예배를 마쳤다.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나올 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는 한 여인이 눈에 띠었다. 고인의 약혼녀였다. 어깨를 덮은 윤기 나는 머릿결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순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그녀는 그와 몸을 나누며 행복한 삶을 이어 가려고 했으리라. 아침에는 그의 체취를 느끼며 눈을 뜨고, 저녁에는 그의 팔에 안겨 잠들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의 육신을 빌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며 줄 그 많은 즐거움을 그와 함께 누렸어야 했다. 부모의 친지들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그의 영혼을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리고 있을 때 그녀는 그녀에게 익숙한 낮은 곳에서 그의 육신을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도 감사의 제목으로 다가와야 하는가.

감사(感謝)라는 단어는 느낄 감(感)과 사례할 사(謝)로 되어 있다. 사(謝)자는 말(言)과 몸(身)에 손(手)을 붙여 놓은 단어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세는 마음으로만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나타내고 몸으로 표현하고 손으로 헌신한다는 뜻일 것이다. 감사에 ‘사‘는 없고 ’감‘만 있을 때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닌 느낌 수준의 감사에 지나지 않는다.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교회 뜰에는 눈부신 햇살 대신 저물녘의 눅진함이 깔려있었다. 고작 서너 시간도 못 버틸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