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난 자리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인기 칼럼 <Dear Abby>에서 읽은 글이다. 어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옷장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을 열어보고 며느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상자 안에는 며느리가 평생 동안 시어머니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 생일 축하 카드 등이 하나도 개봉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정확한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시어머니는 그렇게 미움의 흔적을 남겼다.

 

남편은 대학노트로 이십여 권이나 되는 삶의 기록을 남겼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것을 읽지 않고 있다. 어쩌면 끝내 읽지 못할 수도 있다. 읽을 용기가 없어서다. 그에게서 어떤 해명이나 변명의 말도 들을 수 없게 된 지금 내 마음에 작은 상처가 될 내용이라도 적혀 있을지 두려운 것이다.

 

개인의 흔적은 일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나 인류의 흔적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그 가운데는 길이 남기고 싶은 훌륭한 흔적도 있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수치스러운 자취도 있다. 이런 남기고 싶지 않은 흔적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는, 그것을 혹 감추거나 지워버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지만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몇 해 전에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유명 큐레이터의 가짜 학위 소동은, 본인의 몰락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어 있을 뿐이다.’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 낸 이 사건은, 서로의 이메일에 남긴 당사자들의 밀어의 흔적들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서 큐레이터 주위 여러 사람의 파멸을 몰고 왔다.

 

그런가 하면 역사에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고난이나 상처를 보듬고 그 치유에 지혜를 모았던 일도 있다. 조선조 인조 때에,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이 끝나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많은 부녀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육체적 순결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인조는 한양 북쪽에 큰 목욕탕을 지어 놓고 거기서 몸을 씻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귀환 포로는 모두 깨끗하니 문제 삼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인조는 민생도 외교도 모두 실패한 왕이었지만, 상처 입은 흔적을 덮어 주는 일에는 왕다운 지혜를 보였던 셈이다.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글이나 훌륭한 작품은 영원히 남는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기를 원한다. 과학자는 인류에 이바지할 위대한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기를 꿈꾼다. 국가는 자국의 영토를 확장한다거나 민주주의 같은 좋은 제도를 세우려고 또 노력한다. 그러나 좋은 흔적이란 반드시 이런 위대한 업적이나 훌륭한 걸작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다거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생을 살다 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네 잔잔한 일상의 흔적들도 그런대로 이어지고 또 후세에 남길 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일본 작가 오자키 가즈오는 “곤한 인생속에도 반드시 둘도 없는 이야기의 결정(結晶)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했다.

 

유형의 흔적이거나 무형의 그림자거나, 비범하거나 평범하거나 간에 사람들은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간다. 그것은 평소의 생활이나 일기로도 남고, 생전의 그에 관한 타인의 기록이나, 비문이나 요즘은 인터넷에도 남는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내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남겼으면 한다.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기록한 자서전이 아니고 나의 평생의 사랑과 삶이 배어 있는, 진실이 묻어나는 그런 글을 말이다. 

 

찰스 램의 “도시와 시골의 모든 소리를 포함한 인생의 소리 중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것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느낌의 소리로 기억되고 싶다. 내 자손들이 큰 잔치를 치를 때마다 반드시 펴보는 레시피(recipe) 책 한 권쯤도 써 두고 갔으면 한다.

 

마음에 상처로 남는 기억이 아닌, 따뜻하고 좋은 자취를 남기고 싶다. 이러한 자취들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급조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 일은 오늘  삶의 뜰에서 쌓아야 한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매 순간, 하루하루 날줄과 씨줄로 엮어가야 하리라. 한 땀 또 한 땀 정성 들여 수 놓아야 할 인생의 대명제다. 그렇게 순간순간 남은 삶의 궤적을 그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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