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신순희
식탁 위 화병에서 장미 꽃잎이 툭 떨어진다. 책을 읽다말고 그 섬세한 소리에 놀라 귀 기울여 보니, 체념하듯 그러나 명확하게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오면 꽃잎이 피고 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패티김은 ‘9월의 노래’를 불렀다. 가수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로 꼽는 이 곡을 나도 좋아한다.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노래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데 유행가 가사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시애틀이 가을로 들어선다. 이제 비가 주룩주룩 오겠지. 왜아니 쓸쓸할까. 벌써 스산해진다. 땡볕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해는 짧아지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시상이 떠오를만하나 실상은 다르다. 요즘은 사춘기 소녀도 단풍진 잎이 아름답다고 책갈피에 넣는 일 따위에 관심이 없다. 나이 들어서 낙엽지는게 즐거울 리 없다. 자연이 돌아가는 게 인생과 너무나 닮아서 눈물이 난다. 뭔가 씨앗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캘리포니아에 사는 지인은 비가 주룩주룩 오는 시애틀에서 좀 살았으면, 하고 부러워한다. 누구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나는 따뜻한 남쪽 나라,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여인들이 해변을 거니는 캘리포니아가 부럽건만.
9월은 여름과 가을을 연결해 주는 달이다. 여름도 아니고 가을이라기에는 미진한 날씨를 보여준다. 여름인가, 아니 가을인가를 반복하다보면 완연한 가을로 들어선다. 가을이 오는 소리는 다르다. 나뭇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느라 나무가 오소소 떨고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비가 후두둑거린다. 상수리나무에서는 상수리가 톡 떨어지고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소리, 만물이 떨어지는 계절, 그래서 가을을 폴(fall)이라 부르나 보다. 사랑에 푹 빠지는 것이 폴 인 러브(fall in love)인것도 다 이유가 있다. 가을이니까.
가로수도 지고 우리 마음에도 낙엽이 진다.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리. 중년 남자들의 마음을 흔든다는 가을 바람이 분다.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는 여인이여, 가을남자를 조심하라. 마지막 사랑이라며 당신의 마음을 훔칠지도 모른다. 영화처럼 사랑이 올지 모른다. 로맨스를 조심하라. 이런 말을 듣는 남자들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쓸쓸한 척, 속으로 미소를 지으려나.
지나간 첫사랑이 그리워질까. 언젠가 친구가 우연히 첫사랑의 남자를 보았다고 얘기했다. 물론 친구 혼자 봤으니 상대방은 모르는 일. 예전의 순박함은 사라지고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역시 첫사랑은 멀리서라도 만나지 않는게 좋더라, 생각 속에 머무는게 훨씬 그럴듯하더라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져도 딱히 추억할 사랑도 없이 별 볼일 없는 나는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9월의 노래’를 들으며, 참 가사 좋고 노래 좋고, 하면서 혼자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어느 날은 종일토록 같은 멜로디가 입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 나온다. 밥을 하면서 한 소절, 국을 끓이며 한 소절, 나중에는 설거지하다가 한 소절. 그러면 핀잔을 주던 남편 입에서도 어느덧 같은 노래가 나온다. 역시 유행가는 전염성이 강하다.
꽃잎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사랑이 오고 가고 또 오고, 사람이 살고 지고 또 살고, 계절은 오고 가고…..가없는 세상이다. 앙상한 가지마다 바람이 이는 겨울이 오기전에, 삼라만상이 툭툭 떨어지는 이 가을날, 내 마음에 작은 돌 하나 올려 두련다.
[2013년 9월]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네요. 저도 비오는 가을이 그리워지네요. 사람은 가까이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비오는 날, 안개낀 자욱한 숲속에서 낙옆을 밟으며 걷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