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하늘

 

                                                       신순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나는 시애틀에 앉아서 남의 일처럼 듣고 있다. 슬픔은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2월 계획한 한국 여행이 무산됐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할 때여서 비행기 예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국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 가면 되지 않느냐고, 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갈 수 없는 나의 상황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울지 못해 가슴이 답답하다. 식구들 몰래 슬픔을 삭히느라 힘들다. 한 번만 실컷 울었으면 좋겠다. 석 달여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편 마음도 이러했겠다. 상심하던 남편이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어쩌자고 이 어려운 시기에  두 분이 돌아가시어 빈 하늘만 바라보게 하는가.

 

호상好喪이라고 한다. 세상에 부모 돌아가시어 좋은 일은 없다. 남아있는 가족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다. 어머니 구십이 넘었으니 사실 만큼 사셨다. 잘 가셨다 애써 말하지만, 어머니 돌아가시어 잘 된 것 하나 없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다. 어머니 마지막 길에 내 형제자매와 함께하지 못했다.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슬픔은 나누면 작아진다고 하건만.


어머닌 누가 나이 묻는 걸 싫어하셨다. 아이고 오래 사셨네요, 하는 소리를 들으면 오래 산 게 죄 같고 미안해진다는 말씀이었다. 늙은이 얼굴 자꾸 찍어 무엇하나, 사진 찍기도 싫어하셨다. 듣지 못하시니 대화가 어려워 화이트보드에 쓰기를 시도하지만, 곧 지쳐 긴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텔레비전  자막이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제야 알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고관절 골절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앉아서만 거동하시다 나중에는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고통이 심해도 의사는 딱히 해줄 게 없었다. 마약성 진통제도 듣지 않으니 그 고통 다 견디어야 했다. 인제 그만 영영 가버리면 좋겠다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잠들면 내일 아침 다시 눈 뜰 수 있을까, 자다가 그대로 죽으면 좋겠다. 매일 죽음과 맞닥뜨렸다. 육신이 불편할수록 정신은 더욱더 맑아지니 근심만 늘어갔다.


언젠가 탁자에 둔 수필집에서 내 글을 찾아 읽으시고는 “신순희, 너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하시던 어머니. 행여 글로서 남을 비난할까 염려하셨다. 내 글의 원천은 어머니 아닐까. 쓰다 보면 어느새 어머니가 나온다. 간혹 시애틀로 부친 어머니 편지는 세로쓰기 흘림체여서 고전을 읽는 느낌이다. “아무 걱정마라. 나는 잘 먹고 잘산다.” 간결하고 명확한 표현으로 하실 말씀만 하셨다.


어머니는 어릴 때 살던 사직동 뒤뜰 화단을 얘기하시곤 했다. 그 꽃밭에 핀 주홍빛 한련화를 좋아하셨다. 시애틀에서 그 꽃을 발견한 나는 얼마나 반갑던지. 씨앗 두 알을 얻어 심은 한련화는 화사한 꽃을 피우고 마늘 냄새 나는 씨앗을 남겼다. 그 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화초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집안 현관 신발장 위에 화분을 두었다. 그 신발장 안에는 먼저 가신 아버지 구두가 십년 넘게 놓여있다.


동네 친구가 하얀 꽃다발을 들고 왔다. 나는 하얀 카네이션을 화병에 꽂았다.

 

 [2021년 3월]

    - 2021년 3월 5일 조이시애틀 http://www.joyseattle.com/news/45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