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를 생각하며

                                                     신순희

 

“뉴요커들은 검은 옷을 입는다. 누군가 말이다. 비지니스맨이 많아서인지 패션의 중심지여선지 아니면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라서인지, 모르겠다.  

 

남편과 함께였다. 뉴욕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를 계획이었다. 그때 맨하탄에서 해외통신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남편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우리를 록펠러 센터 근사한 야외식당으로 초대했다. 센트럴 파크 스케이트장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친구는 웃으면서 한달치 봉급을 날렸다고 했다. 설마 그리 비쌀까 미덥지 않았다. 그때 신세를 아직도 값지못했다.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뉴저지에 있는 친구 집에 갔다. 버스로 친구는 매일 출퇴근 한다고 했다. 노란 백열등 아래 그의 부인이 은은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형광등에 길들여진 탓에 희미한 빛이 불편했다.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우리는 답답하고 침침한 노란 불빛에 적응하느라 애썼다. 다가올 미국생활을 예견한 것이었을까. 1990년대 늦가을이었다.  

 

늦가을, 우리는 뉴욕시를 온종일 걸어 다녔다. 화랑이 즐비한 거리를 기웃거리다  ‘앵그르’의 명화 ‘목욕하는 여인’을 보면서 설마 진품일까 궁금해 하고, 증권거래소 빌딩에 게양되어 있는 만국기 중에서 태극기를 찾아내느라 고개를 바싹 들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를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대에 설치된 자살방지망이 시야를 가렸다. 자유의 여신상은 횃불을 높이 들었지만, 실상은 전망대조차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전망대에서 지금은 911테러 사건 때문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배경으로 웃으면서 사진 찍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물상을 잡아둔 기록이 되었다.  

 

거리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어우러진 가운데, 차도를 건너는 사람들과 노란 택시들이 뒤엉켜 여기가 뉴욕인지 서울 한복판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의 친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뉴욕에서는 두리번거리지 말고 바삐 걸어라. 그날 호텔 밖에선 사이렌 소리가 이어지고, 대도시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뉴욕주의 , 버팔로에 갔다. 캐나다 국경을 눈앞에 두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았다. 멀리 보여서인지 생동감 없는 동영상 같았다.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시는 시어른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오셔서 우리를 픽업했다. 캐나다 쪽에서 보는 폭포가 진짜라고 했다. 폭포의 얼굴은 이쪽 저쪽을 확실하게 갈랐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했다. 배를 타기 청색 우비와 모자로 단단히 무장했다. 강물에 젖은 데크에 폭풍우가 몰아치듯 물이 튀었다. 관광객을 가득 싣고 유람선은 나이아가라 강으로 나갔다. 멀리 보이던 폭포가 물안개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스며드는 외로움이라니. 주위에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나만 홀로 서있는 느낌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다 강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더니만, 감탄하기 보다 말문이 막혀 그저 바라만 보았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절벽에서 엄청난 물이 일렬 횡대로 떨어지며 포말을 만들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귀를 멍청하게 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기쁨의 함성도 슬픔의 통곡도 삼켜버릴 태고의 소리. 나는 점점 작아져 하나의 점이 되었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소멸되는 . 눈앞의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거리를 두자, 아니면 나를 잃을지 몰라. 폭포는 조금 떨어져서 보는 장관이었다. 막상 가까이 가서는 없었다. 모든 것은 거리를 두고 있을때 아름다운 .  

 

우울함이 여행내내 나를 지배했었나 보다. 다시 뉴욕주로 돌아 와서 로체스터에 있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덜덜거리는 폴크스바겐 비틀을 운전하면서 우리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만난 날부터 심야극장에 갔다. 피곤에 지쳐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에 없다. 그날 , 우리는 동생 숙소에 돌아와서야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은 유리그릇으로 이름난 ‘코닝’ 공장을 돌아보고, 카메라 필름으로 유명한 코닥박물관을 구경하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남은 코닝에서 유리 후라이팬 하나. 몸살기운에 마음이 유리처럼 예민해졌다.  

 

며칠을 동생과 함께 보내면서 웬일인지 서로 감정이 상했다. 동생과 굳은 표정으로 공항에서 헤어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로비에 앉아 눈알이 새빨개지도록 울었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이별이 슬퍼서 우는 알았을 것이다. 만에 만난 동생인데 무언가 통하지 않았다. 언니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대접받으려 것은 아니었나. 타국에서 공부하느라 혼자 절약하고 지내면서 그래도 언니가 왔다고 성심껏 관광안내자 역할을 했는데, 나의 소갈머리라니.  

 

친지들이 시애틀을 방문할 때마다 동생의 그때 심정을 알겠다. 여행 사람은 무언가 해주길 바라고 현지에 사는 사람은 관광시켜 주느라 애쓰지만, 서로의 엇갈린 기대로 마음이 상할 있다는 . 그땐 몰랐다. 남이라면 참았을텐데 동생이라고 말을 고르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했다. 말해 무엇하랴. 폭포는 모든 소리를 삼키는데, 겸손하라고 일러주는데, 그리 잘난 했을까. 지금도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생각하면 외롭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왜소할까.

 

[201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