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스김라일락
신순희
첫사랑이다, 그 꽃말이. 내가 너를 처음 보고 푹 빠진 것처럼. 해가 잘 드는 뒤뜰에 심었다. 키 작은 여인처럼 조촐하니 얌전한 태가 난다. 오며 가며 볼 때마다 잘 심었다 흐뭇하다. 어찌하여 네 이름이 미스 김이 되었을까. 코리안 라일락이라 이름 지어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시애틀에서 만난 라일락 모종이 미스김라일락이라고 한다.
꽃나무를 사러 화원에 갔다 너를 만났다. 각종 나무가 그득한 화원에서 사람들이 봄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보다 분재 같은 느낌을 주는 나무를 보았다. 일본 단풍이다. 재패니즈 메이플이라고 꼬리표가 붙어있다. 그러고 보니 몇 종류의 나무 앞에 ‘Japanese’라고 쓰여있다. ‘Korean’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나무는 보이지 않는구나. 얄궃은 마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다 라일락 모종에 ‘Miss Kim’이라고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 네 이름이 미스 김이라고!
초여름이 되니 제법 꽃송이가 열렸다. 아직은 어리지만 향기가 대단했다. 진동하는 향기 따라 벌들이 몰려들었다. 어른 주먹만 한 꽃이 피는 흔한 라일락보다 꽃송이는 작지만, 향기가 뜰에 가득했다. 어느 유명 제품 향수가 이만할까. 자잘한 진보라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점점 연보라가 된다. 대롱에 별꽃이 핀 것 같다. 누가 명명했을까?
한국 산야에서 자생하던 수수꽃다리였다. 미스 김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한국에서 수출한 꽃나무인 줄 알았는데, 미국으로 무단반입된 아픔을 갖고 있다. 수수꽃이 다닥다닥 달린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수수꽃다리. 소박하고 수수한 그 이름이 혀를 굴려야만 발음할 수 있는 라일락이 되었다니.
북한산에 자생하는 꽃을1947년 미국인 식물채집가 엘윈 미더가 불법 채취해 미국으로 가져가 품종을 개량하고 특허 등록을 했다는 위키백과의 설명이다. 털개회나무 종자인데 수수꽃다리속 식물이다. 이름의 유래가 미더를 도와 식물 자료를 정리하던 한국 여인의 성을 따서 ‘Miss Kim Lilac미스김라일락’이라고 지었다고 하지만, 더는 확인할 길 없다.
당시 한국은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무런 힘이 없었겠다. 가난에 지쳐 먹고 사는 일이 급한데 들녘 식물 따위 관심 줄 겨를이 있었으려고. 그렇게 조국을 떠난 너는 아무 말 못 하고 미스김라일락이 되었다. 태평양을 건넌지 이십여 년이 넘어서야 다시 한국을 찾았더구나.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견디었는지 묻지 않겠다. 뭇사람들은 한국에서 불법 채취해 간 너를 미국에서 다시 한국에 돈 받고 되팔았다고 속상해하지만 어쩌랴. 알고 보면 그런 운명이 어디 한둘일까 보냐.
국력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국이 스스로 ‘Korean’ 이라고 영어로 표기한 토종 꽃나무가 얼마나 화훼시장에 나와 있는지 모르지만, 아직 난 만나본 적이 없다. 이제 한국은 문화 강국이 되어 코리아의 K자 하나로 세계를 누빈다. 힘을 가진 만큼 우리 것을 지킬 것이다. 수수꽃다리,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니 누구 탓도 아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꽃. 산자락 어느 한 귀퉁이에 피어난 꽃나무. 보라향에 반한 이방인이 탐을 내 가져가 버렸네. 이국의 꽃이 되었지만, 떠나온 산천 잊지 않았다. 바람 부니 꽃향기 멀리도 가는구나. 그때 눈에 띄지 않았다면 아직도 산속 응달 어디선가 홀로 피고 지는 수수꽃다리로 남아있을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자. 나 역시 미스김라일락이라는 이름 때문에 너를 보았다. 이름은 뿌리이고 본향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와 또다시 세계로 퍼져 나간 미스김라일락, 너는 지구촌 곳곳에 새로이 뿌리를 내린 한민족의 그림자인가. 비록 뿌리는 옮겼지만, 태생을 잊을 수는 없다. 그래선가, 유난히 짙은 향기로 나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수수꽃다리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무단으로 나무를 캐간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여운으로 남지만, 시애틀에서 너를 만난 나는 오지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처럼 애틋하다.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은 딸을 보고 친절히 미스 김이라고 불렀다. 나에게는 미시즈 김, 남편에게는 미스터 김, 그러니까 우리는 김스 패밀리이다. 한국에서 미스 김이라고 부르면 뭔가 속된 것 같기도 했는데, 여기선 그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호칭이다. 너의 이름이 미스 김이니 얼마나 좋으냐. 너와 나는 같은 가문이라 말해도 되겠구나. 생각해보면 미스김라일락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너, 근본 있는 나무가 되었다.
어느 봄날, 처음 만난 미스김라일락은 여섯 해 넘게 우리 집 뒤뜰에서 나와 함께 피고 지고 있다. 바람 불면 수수꽃다리 사무치게 흔들리고 비 오면 수수꽃다리 숨죽여 젖어 들고.
201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