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점이 고모

유숙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34개월 만에 재개되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60여 년 만에 헤어진 가족과 재회한 이들은 지난 220일부터 25일까지 북측과 남측이 각각 3일씩 신청자와 가족이 만났다. 개별상봉, 단체상봉, 공동중식 등 5차례에 걸쳐 10시간을 만났고 마지막 날 금강산호텔에서 북측상봉 대상자와 남측 가족이 1시간의 작별상봉을 끝으로 짧은 만남의 종지부를 찍었다.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만남 자체로 만족한다면 모를까, 얼싸안고 우는 것 이외에 서리서리 쌓아 놓은 가슴속 한을 제대로 풀지 못했기에 한 맺힌 이산의 슬픔만 더 가중되지 않을까 싶다. 제한된 시간, 마냥 자유로울 수 없는 분위기에서 상봉은 꿈에 떡 맛본 듯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런 개운치 않은 모습을 볼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기 오래전, 선친께서 세상 뜨신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한다.

 

선친께서는 살아생전 개성에 계신 가족을 늘 그리워하셨다. 특히 홍점이 고모 탓에 마음 아려하셨다. 명절 때가 되면 하얗게 밤을 밝히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내가 죽거든 개성이 있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게 해다오.” 하셨던 유지를 받드는 것이 고작 자식 된 도리였다.

 

내 친가는 개성이어서 6. 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섣달그믐이면 설을 쇠러 할아버지 댁엘 갔다.

그뿐만 아니라 방학 때에도 언니와 함께 가곤 했다. 할아버지 댁은 삼포 밭과 농사를 겸하여 짓는 호농이다. 선친께선 장남이었으나 학업에 뜻을 두셔서 일찍이 서울로 오셨기에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불효를 죄송스럽게 생각했다. 두 분의 남동생 아래로 터울이 뚝 떨어져 태어난 여동생을 무척 사랑하셨다. 고모는 태어날 때부터 팔에 붉은 점이 있다 하여 할아버지께서 홍점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촌스러운 이름과 달리 곱고 단아했다. 가을의 코스모스처럼 가냘프고 구절초처럼 우아했다. 게다가 고모를 더 빛나게 만드는 것은 아리따운 품성이어서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고모가 혼기에 처했기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 왔다. 그중에 양복점을 경영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인물 좋고 성실하여 매파들이 청년의 집 문이도록 드나들었다는데, 어른들 말씀대로 연분이 따로 있었는지 많은 신붓감을 제치고 고모에게 청혼했다. 흠이라면 타지 사람이기에 근본을 모르는 것, 조실부모하여 혈혈단신이라는, 자수성가하느라 나이가 조금 든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반듯하여 할아버지께서 흔쾌히 승낙하셨다. 외동딸 결혼 준비로 가족은 물론 문중이 분주했다.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어머니께서 개성에 머무르시며 혼수를 준비하셨다. 1949 가을 고모는 연지 곤지 찍고 꽃가마를 탔다.

 

외롭게 살아온 고모부라 고모와 처가 극진했다. 고모부는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양복감을 사러 서울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에 머무셨다. 전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 서울에 오셨다가 사흘 만에 한강 철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백방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보았으나 매번 허사였다. 우리 집에서 몇 달을 계시다가 중공군이 밀려오는 1.4 후퇴 때 헤어졌다.

중공군이 쫓겨가고 서울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1953727일에 3년의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즈음 고모부가 오셨다. 선친께서 무척 반기셨다. 전쟁통에 생사를 모르고 지내다가 살아 돌아온 것이 감사하다 하셨다. 거처를 정했다는데 어디쯤인지 묻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고모부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들르셨다. 세월은 흐르는데 늘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신 고모부가 딱해 오실 때마다 양친께서는 결혼을 권하셨다. 젊은 사람이 언제가 될는지 모르는 통일의 그 날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으셨다. 고모부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고모와 함께한 시간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덧없는 세월은 어언 15년이 흘렀다.

 

어느 해인가. 추석 인사오신 고모부께 “더는 자네가 보고 싶지 않네.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네 길을 가게나.” 하셨다. 선친께 고모를 못 잊어 독신으로 지내는 고모부가 딱해서 매몰차게 내치셨다. 고모부도 이미 50 고개를 넘기셨다. 신혼의 바래지 않은 아련한 꿈을 가슴에 묻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소중한 젊음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모진 말씀을 하셨다. 그날 밤, 안방에서 두런두런 나누시는 말소리가 들렸고 두 분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지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설날 아침. 고모부는 오지 않으셨다. 명절 때면 일찍 오셔서 덕담을 나누시던 고모부는 해가 높이 떠올랐는데도 오지 않으셨다. 떡국이 붓고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식사하자는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는 퉁퉁 불어 국물이 걸 죽 해진 떡국을 늦은 아침에야 먹을 수 있었다.

 

고모는 낙엽이 지는 소리에도 방문을 열어봤을 것이고 밤바람이 문창호 지를 훑고 지나가도 '행여나' 하는 마음의 귀를 곤두세웠으리라. 그리움과 기다림에 잠 못 이루며 긴 세월 외로움을 어찌 견디며 지내셨을까. 가슴에 고이는 고독과 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기에 고모는 너무 젊었고 오로지 결혼 생활 8개월이 전부였다. 꽃 한 송이 피워 보지 못한 채 바람에 묻혀버린 사랑. 역사의 흐름은 묵묵히 나름의 빛깔과 깊이와 크기로 새겨가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막연함은 피를 토하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고모부 역시 고모에 대해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삶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운 만큼 정지된 사랑이 아프셨으리라.

 

휴전이 성립된 지 60이 지났다. 할아버지, 삼촌들이야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이산가족 상봉에 고모와 고모부가 만나셨을까? 4차 이산가족 상봉 때 고모부 비슷한 사람이 잠시 TV 화면에 비쳤었다는 동생의 말을 들었으나 신빙성이 없고 지금은 흩어져 살고 있으니 혹여 하는 기대도 해볼 수조차 없게 세월이 너무 많이 우리를 앞서.

 

많은 댕기 머리가 보기 좋고, 갸름한 얼굴이 미인도를 연상케 했던 고모. 자태가 곱고 얌전해서 누구에게나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 고모는 이렇게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가을이면 꽃가마 타고 시집가던 고모가 생각난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릴 때마다 꽃길을 따라 선뜻선뜻 걸어오던 고모부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