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물

유숙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큰아들과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결혼 후 아들은 해마다 어느 하루를 엄마에게 선물한다. 평소 내가 가 보고 싶었지만, 선뜻 나설 수 없었던 곳으로 떠나는 모자지간의 여행이다. 아들과 나는 코드가 잘 맞는 편이라 말수가 적은 남편과 다닐 때와 분위기가 다르다.

‘엄마는 딸이 없어 나이 들어가며 많이 외로울 것’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 씩씩하게 잘살고 있는데도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이 쓸쓸해 보였나 보다.

 

결혼 전 아들은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번역판을 사다 주고 대화하며 감상하길 좋아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Walden)이나 제이 알 알 톨킨의 ‘반지의 제왕’(The Load of the Ring) 등은 오랜 세월,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감상을 나누었기에 인상에 남는다.

학부에 있을 때 아들은 고색이 창연한 벨 에어를 거쳐 집으로 오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방금 거쳐온 드라이브 길을 다시 함께 즐기러 나갔다. 예전에 우리가 살았던 템즈 강변의 마을을 잊지 못하는 나에게 고풍스러운 유럽 스타일의 풍물을 간접 경험시키려는 마음에서 일 게다.

오늘, 활엽수가 누렇게 물든 거리를 달리며 비 오는 날의 낭만에 젖는다. 도시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주는 빗소리가 싱그럽다. FM 라디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Romance Suite from ‘ The Gadfly’ Op. 97a)’가 흘러나온다. 웅장한 비극적 분위기에 멜랑콜리한 풍취를 담고 있는 첼로 음률이 매혹적 애상을 더한다.

영화 등에(Gadfly)’에 삽입되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곡, 고독의 슬픔이 잦아드는 낮고 깊은 멜로디가 온몸으로 스며들어 비 오는 날 들으면 제격이다. 가슴을 에는 음악이 차 안에 늪처럼 고인다. 허밍으로 따라 부르며 아들을 쳐다본다.

‘아들,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다.’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빙긋이 웃는다. 그 미소의 의미를 나는 안다. 엄마의 옛 버릇이 도진 것을 알아차렸다는 무언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편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적이 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초등학교 시절, 유럽 지사에서 근무하는 아빠가 그리울 때면 아이들은 나란히 잔디에 누워 하늘을 향해 목청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흙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새파란 하늘 저편에 계신 아빠에게 구름이라도 타고 두둥실 떠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 연거푸 힘차게 부르다가 끝자락에 가서 즐겁지 않게 끝난다. 노래만으로는 그리운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일 게다. 그런 날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클래식 소품을 감상시키며 해설을 덧붙이곤 했다.

어이 아들, 이 곡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야,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다. 하며 듣건 안 듣건 관심이 있건 없건 꼭 곡명을 말해 주고 짧게나마 해설을 곁들였다. 그때는 귀찮아 건성으로 들었는데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마음속에 남아 있더라는 말을 훗날 아들에게서 들었다.

 

아들의 미소는 잔소리 같았던 그때를 떠올렸으리라. 누가 아들이고 누가 엄마인지 모를 정도로 철없이 살았던 그때를. 이제 아들은 장년이 되었고 아직도 철이 덜 든 것 같은 엄마는 첼로의 선율에 푹 빠져 예전의 그 버릇을 되풀이하고 있다.

 

로망스는 곡이 중반을 넘어서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조가 바뀌니 연주가 활기차다. 아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한다. 쇼스타코비치를 떠올리면 탄압받는 지식인의 고뇌에 찬 표정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작곡을 통해 러시아인들의 공통된 불행과 운명을 나누어 가진 것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도와 체제에서 저항한 음악인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 속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억눌리고 고단했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고뇌와 번민을 대변하듯 비애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유려한 곡들을 작곡했다.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폐부에 와 닿는 낮고 깊은 멜로디가 가을의 우울을 연상케 했다. 누군가에게 가슴을 열고 싶은 무언의 하소연, 눈물이 말라버린 가슴에서 쏟아내는 조용한 신음 같았다. 쇼스타코비치가 23년 동안 살아온 아내 니나 와실리에브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쓸쓸함과 허망함을 진하게 담았기에 묻어나는 슬픔인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명화 ‘Kiss’의 배경 음악으로 선보이며 그림과 음악의 절묘한 묘미를 더했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음악이 끝났다. 3분 13초.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쇼팽의 마주르카가 분위기의 흐름을 확 바꿔 놓는다.

 

어느덧 차가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로 접어든다. 하늘도 바다 같고 바다도 뿌연 하늘 같다. 차가 눈에 띄게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아들은 그동안 밀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며느리와 함께 세운 계획과 실현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털어놓는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동상이몽이란 말이. 장성한 아들은 원대하게 펼쳐질 미래를 꿈꿀 때 나는 저 물빛 젖은 추억의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내 감상이 갑자기 진부하고 쑥스럽게 여겨졌다. 젊은이들은 꿈을 먹고 살고 나이 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이렇게 맞을 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아들, 다시 한번 말해 주지 않겠니 너희 계획을.’ 나는 진지하게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 이거다. 마음은 미래를 향한 것이야. 인생은 70부터라 하지 않던가. 얄팍한 감상에 젖어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며 아들의 정신세계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거야.

 

따끈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 마침 길가에 커피숍이 보인다.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듬직하다. 저 아들과 음악을 듣고 친구처럼 지냈고 노을을 보고 별을 세며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가. 딸이 없어 외로울까 봐 바쁜 시간을 할애한 아들과 시간을 선물하도록 배려한 며느리의 마음 씀이 고맙다. 이제는 내가 아들 며느리에게 어느 하루를 선물해야 겠다.

행복했던 하루가 저물고 있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