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리운 계절
유숙자
연말이 가까워지자 연거푸 나갈 일이 생긴다.
연례행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가며 '밥 한번 먹자'는 듣기 좋은 말로 자주 회동하게 된다. 체중이 불어도 “식이 막대”라는 고사성어가 있기에 마음 가볍다. '아무렴, 자주 보고 살아야지.' 영신을 맞기 위한 송구의 나날은 세밑으로 다가갈수록 차지다. 반갑게 만나서 식사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을 것 같다.
연말 모임은 한 해를 보낸다는 서운함과 새해를 맞는다는 들뜸이 공존하여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어느 모임을 가거나 유머와 위트로 주위를 밝고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큰 목소리로 좌중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으로 인해 때로 분위기가 경직되기도 한다. 익숙치 않은 다양한 개성을 접하다 보면 피곤해지기도 하고 참석을 후회하게도 만든다.
지난번 모임 때에는 말을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을 만나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지.' 할 정도로 시간을 낭비했다. 인간이 갖는 가장 인간적인 연장이 말이라 한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기에 많은 사람이 모일 때는 경청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두서없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화제를 독단으로 펼칠 때 빈자리가 늘게 된다. 말을 조심해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개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알지 못할뿐더러 남의 말을 인정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외롭다. 현대인은 사람과의 접촉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다에서 인간적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훈훈한 인정과 정겨운 대화로 주변을 푸근하게 만들었던 모임에 여운이 남는다.
무심히 앉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 그의 속마음과 일치한다는 것이 재밌다. 무의식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평소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엷은 미소가 잔잔하고 순수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세상 고통을 다 짊어진 듯 지치고 힘든 얼굴도 있다. 무언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성난 얼굴도 본다. 나는 어떤 표정과 행동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을까. 혹시 내가 참석해서 좋았던 분위기가 침체한 적은 없었나. 행동에 모난 구석은 없었나 되새겨 본다.
며칠 전, 골목 입구에서 길을 건너가게 되었다. 그때 마침 자녀를 하교시키는 듯한 어느 중년 부인의 차가 들어서다가 나를 보고 정차했다. 부인에게 먼저 통과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분은 머리를 약간 옆으로 숙여 예의를 표했다. 부인의 환한 미소가 무척 우아하게 보였다. 어떤 향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여준 정중한 태도가 어찌나 가슴 깊게 와 닿는지 그 부인의 인격이 매우 고매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겪어보지 않은 채 상대를 가늠하는 눈금은 품위를 곁들인 예의 바른 행실을 보게 될 때이다. 이런 모습에서 범할 수 없는 기품을 느껴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그 골목을 지날 때면 이따금 부인이 생각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 말과 행동이 인격을 이루고 교양이 더해져 은연중 배어 나올 때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맑은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기에 앞서 내가 나에게 반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겸손으로 자신을 절제하며 매일매일 모난 구석을 다듬어갈 때 마침내 윤기 있고 반듯해지는 다른 모습의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 계절. 그가 있으므로 화기가 돌고 웃음꽃이 피며 향기가 전해지는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누구에게나 신뢰를 주는 사람. 삶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아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 줏대가 뚜렷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소박한 인정을 나누며 헤어진 후에도 여운을 남기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미완의 모습인 나의 존재가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도 한 번쯤 숙고하며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따뜻한 교감, 달콤한 결속의 연결 고리로 삶의 정겨움을 풀어내는 세밑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