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발레리나
유숙자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가 5월 2일 독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89세이다.
그는 볼쇼이 발레단의 안무가, 예술 감독인 동시에 배우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발레리나였다. 2005년 80세 생일을 영국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갈라 공연으로 기념했다. 올 11월에 90세 생일을 위한 콘서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세상을 떠났다.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불운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기에 반란죄로 죽었고 어머니도 반란음모죄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는 공산당 입당을 거역했다는 죄로 일상에서는 물론 무대 위에서도 KGB의 감시 속에 두려움에 떨었다. 무용수들이 서방으로 망명해도 끝까지 볼쇼이를 지켰다.
“왜 망명을 택하지 않았느냐?” 는 질문에 “망명한 동료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았지만 나는 철창 안에서나마 춤을 출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외가의 예술적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1943년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하였고 1958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로디온 세드린과 결혼했다. 1990년 65세까지 현역 예술가로서, 1991년 이후 남편과 독일로 이주해 살면서 러시아와 서방 여러 나라에서 객원 출연자로 자유롭게 활동했다.
“백조의 호수”는 발레의 고전이다.
공연 횟수도 가장 많고 일반인들의 선호도 높다.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거리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공연장을 찾았다. 안무는 같아도 춤추는 사람에 따라 테크닉과 표현이 다른 탓에 15회 이상의 관람에 이르렀다. 로열 발레부터 세들러스 웨일즈 로열 발레, 키로프 발레, 볼쇼이 발레, 파리 오페라 좌 발레, 라스칼라 오페라 좌 발레,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 등 비교적 다양하게 접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백조의 호수”는 1973년 마야 플리세츠카야와 발레리 코프턴(Valery Kovtun)의 공연이다. 그의 공연을 쉽게 볼 수 없는 시기였기에 영상을 통해 보았지만 이제까지 봐왔던 “백조의 호수”와 확연히 달랐다.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섬세하고 정교한지 살아있는 백조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렉 무하마도프(Irek Muhkamedov)와 함께 볼쇼이 발레 전성기를 이루었던 그는 로열 발레의 마곳트 폰테인과 유일하게 맞서는 기량이었다.
1975년 공연한 “빈사의 백조”는 그가 춤춘 발레 가운데 가장 예술성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우아한 표현력과 내면적 성숙도로 완벽하게 소화했다. 생의 의지와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 날갯짓 하나로 표현되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의 분리. 우아한 손놀림. 처절한 발놀림. 그런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빈사의 백조”뿐만 아니라 500회 이상의 “백조의 호수” 공연도 가능케 한 것이 아닐까 싶다. 70이 넘어서 공연한 “빈사의 백조”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활력이 아닌 영혼이 깃든 춤, 날갯짓하는 아름다운 긴 팔, 긴 다리의 강점이다. 마야 플리세츠카야, 그는 진정 백조의 화신이라 하겠다.
“빈사의 백조”는 1907년 발레 뤼스 출신인 안무가 미하엘 포킨(Mikhail Fokine)이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를 위해서 만들었다. 그 전형을 확립한 발레리나가 안나 파블로바였다면 파블로바 이후 최고의 백조는 마야 플리세츠카야 라 평한다. 1986년 6월 12일 그의 나이 61세 때 일본에서 공연한 “백조의 호수”는 원숙한 완성의 미를 보여 주었다. 은퇴할 시기를 넘어선 발레리나가 보여준 테크닉은 한 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그의 발레 볼레로(Bolero)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있다.
발레리나, 발레리노라면 언젠가 꼭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현대무용이 볼레로다. 둥그렇고 빨간 단상 위에서 흑백으로 나뉜 의상을 갖추고 추는 반복적이고 전위적인 춤. 관능미를 앞세운 무용수들의 동작과 혼연일체 되어 흥분을 몰아다 주는 춤. 문명 이전의 원시적 인간 형태를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한 강렬한 동작을 관람하며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리스 여신 같은 위엄과 조각같이 정교한 몸매가 현대무용과 잘 어울려 관중을 열광케 했다. 15분 47초 동안 온몸이 녹아들 것 같은 열정의 화신이 되어 힘차게 뿜어내는 동작. 그는 무려 4분 30여 초 동안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가 1972년에 안무한 첫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손꼽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황실에서, 낙후된 러시아 문명을 근대화하기 위해 파격적인 지원으로 들여온 발레. 서구화의 가장 빠른 길이 발레를 도입하는 것으로 믿었던 표트르 대제가 적극적인 문화 진흥책을 폈고 후에 예카테리나 대제가 계속해서 발레 중흥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기에 러시아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의 안무가 프티파를, 이탈리아의 체케티를 초청하여 발레 육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20세기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파블로바, 까르사비나, 포킨, 니진스키, 발란신 등 거장들이 배출된 것은 러시아 대제들의 문화 정책의 결정이라 하겠다.
국외로 망명하여 활동을 펼친 천재적인 발레리노 루돌프 누리예프와 나탈리아 마카로파는 주로 로열 발레에서 공연했고, 미하엘 바리시니코프는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에서 활동했다. 마야 플리세츠카야 만이 끝까지 볼쇼이를 지켰고 은퇴 후 독일로 이주했다.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활동은 미국, 인도,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브뤼셀의 20세기 발레단과 공연, 파리 오페라단의 객원 예술가, 로마 오페라 발레단, 마드리드 국립 발레단의 예술 감독이 되어 행정 면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우아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70세가 넘어도 “백조의 호수”, “빈사의 백조”를 춤추었던 정열의 화신. 그를 가리켜 예술적 자질과 아름다운 덕성을 갖춘 천재적 발레리나라고, 그의 타계는 세계 문화의 손실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90세 생일 축하 공연을 기획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발레는 곧 그녀의 삶이고, 무대는 그녀의 안식처였다. 한 세기를 풍미하던 발레리나는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춤은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추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평생을 발레에 공헌한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전설이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