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의 집
유숙자
석류를 샀다.
붉고 윤기 나는 것, 크고 흠집이 없는 것으로 골랐다. 깨끗이 씻어 대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싱싱하다. 실하다.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한여름을 잉태한 수고만큼 튼실한 열매로 성장한 모습이 대견하다. 가슴을 열어 보일 왕관이 한쪽도 떨어짐 없이 꼿꼿한 걸 보니 갓 따온 것임이 틀림없다.
석류를 가른다.
알알이 맺힌 열매의 군락들. 잘 익은 알맹이들이 빼곡하다. 마치 루비를 박아 놓은 것처럼 황홀하다. 어느 사랑의 열매가 저토록 아름다울까. 알맹이를 털어내기 전 보석들을 감상한다. 형형이 빛난다. 한 개씩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질서 정연하다. 한 집에 둘도 없고 빈집도 없다. 곱다. 장관이다.
늦은 봄 갸름한 꽃 한 개 피어나서 여름 동안 작열하는 태양과 바람과 노니더니 그 속에서 알알이 꿈이 영글어 수많은 보석을 탄생시켰다. 얼마나 경탄스런 생명의 신비인가. 한 개의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잎과 꽃과 열매. 꽃 한 송이가 변해서 세상을 펼쳤다.
겉보다 속이 아름다운 석류를 보면 숙연해진다. 속보다 겉을 더 치장하는 내가 아니던가. 석류는 미세한 세공의 손놀림처럼 일정한 규격의 결정체로 내공을 쌓아 마침내 완성에 이르는데 나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려 애를 쓰지만 때로는 삶의 다양성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어져가지 못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조금 더 차원 높게 보이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나. 그것은 진정 내가 아니라 가식의 누더기였을 것, 하나씩 벗어버리고 진정 석류의 마음이 되고 싶다. 생명의 과일, 지혜의 과일이라는 석류를 닮고 싶다. 영혼을 비옥하게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열매 앞에 나를 돌아본다.
원산지가 페르시아인 석류는 고대로부터 신성한 식물로 귀중하게 여겨졌으며 권위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522년에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의 대왕 다리우스(Darius) 1세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궁전을 건립할 때에는 석류나무의 꽃과 잎의 디자인을 궁전에 도입하고 다리우스 자신의 의복과 장신구에도 그 문양을 사용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혼례복이나 활옷에 석류문양이 많은데 이는 많은 종자가 들어 있기에 다산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고 귀부인들의 예복이나 장신구 등에도 석류문양을 사용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로 묘사되고 아리아인(Aryan)들은 천국의 과일, 신이 선사한 선물로써 소중하게 키웠다. 열매는 핑크, 자주색, 황색, 녹색 등이 있고 가장 대중적인 것이 빨간색으로 맛도 여러 가지다.
석류를 보면 해맑은 미소가 보기 좋은 J 시인이 떠오른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 남을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때로 자신이 아픈 사람. 정이 많은 사람. 갓 따온 석류를 건네며 “석류알이 아주 곱죠? 이렇게 털어야 잘 떨어져요.” 시범을 보이던 그가 그립다.
시인의 집 석류나무는 크지는 않으나 열매가 실하고 달았다. 표피가 터질 듯 무르익기 시작하면 시인의 대바구니에는 석류가 담겨 나를 찾아오기에 분주했다. 가장 좋은 것으로 건네고 싶어 하는 한결같은 마음. 보석처럼 가슴에 품 겨 있는 고운 마음이 석류알보다 붉다. 근래는 몸이 약해 마음을 먼저 보내온 시인. 육신의 고통을 승화시켜 시를 빚으며 그 산고 끝에 태어나는 보석이 있기에 그는 행복하단다.
시인의 정성으로 알알이 익은 석류, 그의 시처럼 아름다운 석류가 익어가는 뜰로 편지를 띄운다.
<석류가 익었지요? 그 뜰로 나를 초대해 주세요. 기다립니다>
나는 벌써 석류가 익은 J 시인의 집 앞에 서서 나를 반기는 시인과 석류를 만나는 설렘을 보듬고 있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