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카펫을 밟으며
유숙자
플라시도 도밍고의 <데뷔 40주년 기념공연(The Placido Domingo 40th Anniversary Gala)>이 있을 때였다. 데뷔 40주년이라는 뜻깊은 행사이기에 미 전역에서는 물론 세계 각처에서 저명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공연이 LA에서 펼쳐지는 이점이 있어 이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세라 일찌감치 표를 사놓고 하루가 이틀씩 지나기 기다렸다.
미성의 소유자 도밍고는 오페라계의 신화 같은 존재다.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가창력은 누구도 쉽게 넘볼 위치가 아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126개 오페라의 주역’을 소화한 기록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내가 도밍고의 오페라를 처음 감상한 것은 1981년 가을, 런던 코벤트 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였다. 그는 투란도트에서 박력있고 멋진 칼라프 왕자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1983년 <라 트라비아타>를 감상했을 때 40대 초반이었던 도밍고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고 있는 성악가답게 풍부한 성량과 외모와 연기의 3박자가 똑 떨어졌다. 부드러우면서 박진감 넘치는 가창력은 청중을 극 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오랫동안 도밍고의 노래를 흠모했기에 마음껏 그의 예술 인생 40년을 축하해 주고 싶다.
2008년 4월 18일, 여느 때보다 이르게 공연장에 도착했다. 다리가 좀 불편했기에 지하 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공연장이 가까운 인도에서 내렸다. 발렛 파킹 요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평소와 달리 그곳까지 레드 카펫이 깔렸다. 최고 성악가의 공연은 단장부터 다른 것을 실감했다.
레드 카펫 위로 성큼 올라섰다. 발밑에서 전해지는 촉감이 쾌적할 정도로 탄력 있고 부드럽다. 내 곁을 지나는 신사 숙녀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멋있다. 그레이스 켈리처럼 우아한 미소를 띠며 몇 마디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도 있었다. 황홀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인터뷰우(Interviewee) 들과 함께 걷는 동안 나도 스타가 된 기분으로 정문 입구까지 왔다.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앞 넓은 광장엔 흰 천막의 오픈 캐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평소에는 관람객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공간이나 큰 행사 때에는 귀빈들을 위한 간이 휴게소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정문까지는 비교적 한산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표를 사지 못했다는 소리를 적잖이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입장객이 많지 않다. 그제야 남편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건물 귀퉁이에서 남편이 손을 흔들었다. 그곳에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정문 쪽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 틈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남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여사, 저쪽 길로 오셨어?’ 하고 묻는다. 그 말의 뜻을 재빨리 이해하지 못한 나는 남편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내가 걸어온 길인데 새삼 낯설다. 진홍색 카펫을 밟고 오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처럼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왔다면 ‘일반인은 콘서트홀 옆문을 이용해 주세요.’ 라는 안내문을 보았을 거다. 남편이 내려준 곳이 발레 주차 요원이 차를 인도해 가는 레드 카펫 앞이다. 그곳에서 콘서트 홀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곧바로 사람들 흐름에 따랐다. 저명인사들만 밟을 수 있는 레드 카펫을 무명한 내가 여유 있게 밟으면서.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지고 중간마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유명한 분의 콘서트니 당연하다 여겨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극장 관계자들이 나를 내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실로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로비에서 샴페인 서비스가 한창이다. 이것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성악가의 데뷔 40주년 공연이기에 갖추어진 품격 높은 의식 같았다. 혹시 귀빈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하여 조심스럽게 외면했는데 그날의 샴페인은 모든 관람객을 위한 것이었다.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실수할 때가 있다. 전혀 모르고 한 행동이라 해도 뭔가 평소보다 다를 때에는 주의 깊게 살폈어야 했다. 비록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해도 실수임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 실수가 아니었다면 내 평생 언제 스타나 저명인사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레드 카펫을 밟아 볼 수 있겠는가. 멀쩡한 정신으로 즐기며 걷던 그 길. 레드 카펫 양쪽에 구경꾼들이 있었는데도 눈치 없이 당당하게 걷지 않았는가.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 했으니 내가 한 행동에 너무 부끄러워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이 시대의 히어로 도밍고의 큰잔치를 마음껏 축하한다. 환경이 어떻든 온 힘을 다해 보여주는 무대. 그의 음악회가 언제나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 막이 오르려나 보다. 오케스트라의 튜닝이 한층 더 높아진다. (2006)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