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유숙자

작은며느리가 부활절 전날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해마다 연례행사로 작은며느리 친정에서는 가족과 친지들을 초대하여 부활절 오찬을 나누는데 올해에는 우리가 불참하게 되어 며느리가 미리 다녀갔다. 크리스마스에 보고 불과 몇 달 사이인데 윌리엄과 빅토리아가 부쩍 더 자랐다. 11살, 7살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물만 주면 자라는 콩나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반면 큰아들네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네 식구가 미국에 온 지 30년이 지났다.

1980년 남편의 근무지가 런던이었다가 85년에 미국으로 왔으니 아이들 10대의 반반을 두 나라에서 보냈다. 아들 녀석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잘 적응해 주었고 사춘기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차분했다. 보이 스카우트 단원 생활을 꾸준히 한 것도 한몫했으리라. 한마디로 수월하게 컸다. 순조롭게 교육 과정을 마치고 전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의 때에 일가를 이루어 결혼 문제로 부모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을 곁에 두었던 것이 정서에 도움이 되었는지 정신적 풍요에 가치를 높였다. 주변에서 우리 가정을 부러워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자식은 결혼 전 아니면 후에라도 한 번은 속을 썩인다고. 우리 집은 이 속설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작은아들이 형보다 7년 먼저 백인 신부를 맞았다. 결혼하고 5년이 지날 때까지 며느리가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작은며느리는 꽃가루와 음식 알레르기가 심하여 특별한 약을 먹기에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작은아들은 이미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작은아들 내외는 결혼 10년 만에 흑인 아들을, 4년 뒤엔 백인 딸을 입양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큰아들이 결혼했다. 큰며느리가 신혼여행 다녀온 후 첫 번 가족 모임에서 아기 가질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아기가 싫단다. 우리 내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신혼 초니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살다 보면 아기가 생길 것이고 처음 마음과 다를 수 있으니까.

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 함께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동화책을 읽어 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별을 세며, 노을을 감상하는 일 등 아주 소소한 바람이었다. 열 달 내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일은 초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아기를 원치 않는다는 큰며느리도 막상 아기가 생긴다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했으나 아니었다. 긴 세월 살아오며 며느리는 아기 없는 삶을 허전해 하지 않았다. 아기를 그토록 원하던 아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그냥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 집 두 아들은 음식을 잘 만든다.

영국은 중학교 2학년 교과 과목 중 Arts가 있다.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전통 요리에서 샐러드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실습한다. 중학교 5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데 Arts는 입시 선택 과목 중 하나로 뽑힐 만큼 비중이 크다. 아이들은 이 과목을 재밌어했고 집에서도 종종 음식을 만들어 식구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집 며느리들은 음식을 만들 줄 모르나 걱정 없다. 음식 잘 만드는 남편이 있는 탓이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미래의 아내를 위해 예비 훈련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라면 한 개 끓일 줄 모르는 남편과 사뭇 대조적이다.

 

세상이 변했다.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이 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는다. 결혼했어도 출산 문제에서 벗어난다. 물론 아기를 낳아 잘 키우는 부모가 대부분이지만, 일에 방해받는다며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혼을 쉽게 한다. 시집갔다가 쫓겨올까 봐 친정에서 겁먹던 시절, 시집갔으면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말은 전설의 고향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댁에서나 남편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혼해라 하는 부모도 보았다.

 

젊은 부부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주로 남편들이 아기를 돌본다. 아내들은 친구와 이야기에 바쁘다. 육아용품이 들어 있는 백을 어깨에 메고 푸시 체어를 밀거나 아기를 가슴에 달고 가는 쪽은 남편이다. 아내는 아기엄마 같지 않은 자태로 보무도 당당하다. 내가 딸이 없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정작 본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마냥 행복한 표정인데 예의 장면을 볼 때면 젊은 아빠들이 안쓰럽다.

 

쇼핑몰에서, 길을 걸을 때, 임산부나 어린아이를 보면 시선이 머문다. 불룩한 배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번쩍 들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친구들은 보통 5.6명의 손자 손녀들이 있다. 우리도 작은아들에게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가 있다. 가슴으로 낳은 아기일지라도 작은아들 가정은 윌리엄과 빅토리아가 있어 행복하다.

 

큰아들네에서 이제나저제나 아기 소식 오기를 기다렸으나 며느리의 의지가 하도 굳어 단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왜 말 한마디 못하느냐지만, 시어미가 뭐라 할 것인가. 시카고에서 태어나 외모만 한국 사람이지 자기주장이 뚜렷한 미국 사람인데 아이 문제는 당사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나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조금은 관대해지고 현명해져서 과장 없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세월이 흐른 만큼 누릴 수 있는 행복이 크니까. 손주들이 와서 왁자그르르 떠들며 노래하며 뛰놀며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노후를 꿈꾸며 기다렸는데 우리 가정에서는 그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큰아들 내외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빠지곤 하다. 봄이 되어 희망으로 설레던 시절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 황홀했든 기대감마저 사라지고 덧없이 세월만 흘려보낸 것이 아닌가.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을 하지 않아도 남편이라고 왜 자신의 후손이 그립지 않겠는가. 친지의 손자 손녀를 보며 속 깊은 한숨을 삼켰으리라. 바람만 감겨드는 허허로운 가슴에 예쁜 손녀 하나 안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 하늘만 하나, 별처럼 먼 이야기가 일 것 같다.(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