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
유숙자
로열 발레가 <백조의 호수>를 가지고 남가주를 방문한다. 이번 로열 발레의 방미가 반가운 것은 내가 영국을 떠난 지 3년 만의 재회이다.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단의 공연이 연중 이어지는데 로열 발레의 무대만큼은 스케일 면에서나 안무와 테크닉, 의상에 이르기까지 단연 차별화된다.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의 대표작으로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이콥스키의 작곡과 라이징거의 안무로 1876년 2월 20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 후 로열 발레의 케네스 맥밀런이 새로운 안무를 선보여 차원 높은 발레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마법사 로트바르트에 의해 백조로 변한 왕녀 오데트는 밤에만 사람이 되는데 그녀를 사랑하는 왕자 지크프리트의 사랑에 의해 마법을 푼다는 줄거리이다. 4막의 마지막을 악마를 쓰러뜨리고 지크프리트와 오데트가 결혼으로 맺어지는 것과 함께 호수에 빠져 죽음으로 끝을 맺는 비극이 있는데 거의 죽음 쪽을 택한다.
내가 로열 발레의 백조의 호수를 처음 관람한 것은 1975년이었다. 당시에는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했다. 1978년 5월 로열 발레단이 다시 초청되었다. 동아방송 개국 제15주년 및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일환의 행사였다. 공연 작품으로는 ,<백조의 호수 전 막>, <마농>, <4개의 단막(공기의 정, 모노톤스, 햄릿과 오필리아, 에리뜨 싱코페이션스)> 등이다.
객원 무용수 마고트 폰테인이 60세 나이에 우리나라 무대에 섰다. 120여 명과 함께 내한한 폰테인은 영국 여왕 즉위 25주년 기념 축제를 위하여 특별히 안무 되었던 <오필리아>를 춤추었다. 마고트 폰테인은 이미 1960년 중반에 영화로 선보인 <백조의 호수>, <불새>, <수정 온딘> 같은 작품이 있기에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다. 마고트 폰테인은 연륜을 넘어선 우아함과 정교한 테크닉으로 이 시대 최고 발레리나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예술의 본고장인 유럽에 살 게 되면서 발레를 관람할 기회가 많았기에 현역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안타까움을 대리만족으로 채울 수 있었다. 1980년 즈음 영국에서는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리예프의 독주 무대에서, 앤서니 드웰, 웨인 이글링 등의 발레리노와 나탈리아 마카로파, 레슬리 콜리어, 알렉산드라 훼리 등의 발레리나가 대물림을 받아 유럽을 한창 휩쓸며 공연했다. 당시 마카로파는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와 오띨의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함은 물론 그가 백조를 가장 백조답게 춤추는 발레리나로 유명했다.
백조의 호수를 눈물로 관람한 적이 있다. 1967년 가을, 동아일보사에서 아세아 발레 축제를 개최하여 일본의 발레 안무가 소목정영을 초청, 백조의 호수 전 막을 시민회관 대강당(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 그때 나는 첫아이를 출산한 지 7일밖에 되지 않아 산후조리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 남편이 섭섭함을 덜어 주려고 표를 사다 주었다. 공연을 관람할 수는 없겠으나 관람권이라도 쥐고 있으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 공연 일자가 마침 토요일이었고 남편이 일찍 퇴근하여 아기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나는, 책상 위에 메모를 적어 놓고 살며시 집을 나와 시민회관으로 향했다. 집에서도 거동이 불편했는데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 어떤 초인적 힘에 끌렸던 것 같다.
그날, 입추의 여지 없이 홀을 가득 메운 관중 속에서 나는 흐느끼며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다. 검정 슈트 안에 두툼한 천을 대었건만 젖이 새어 옷매무새가 말이 아니었다. 간혹 아는 사람을 만나면 두 손으로 가슴을 싸안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피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첫아들을 잠시 잊고 철부지 엄마는 발레에 빠져 흐느끼고 있다. 4막 마지막 부분을 얼마 남겨 놓고 무대를 보며 뒷걸음질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한 신이라도 더 보려고 차마 홱 돌아설 수 없었고 조금 일찍 나와야 혼잡을 피할 수 있었기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의 생후 7일 아기를 들여다보며 말할 수 없이 큰 죄책감에 괴로웠다. 아기는 내가 집에서 발뒤꿈치를 떼자마자 울기 시작하여 우유도 먹지 않고 계속 보챘다고 한다. 가까이 사시던 친정어머니가 오시고 나서야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고 하니 어머니와 남편 볼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는 퉁퉁 부은 내 얼굴과 젖으로 지도를 그린 슈츠를 보시더니 해괴망측한 몰골에 기가 막히시는지 혀를 끌끌 차셨다. 어미의 모습이 한심스러워 아기가 울었을 것이라며 나의 철없는 행동을 몹시 꾸짖으셨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는 걸까. 이제 내가 설 자리는 무대가 아니라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인 것을. 어찌 이런 감상에 젖어 생후 7일의 아기를 잠시라도 잊고 있었을까. 이제는 생활인이거늘-. 그 생각도 잠시, 상자에 넣어둔 튀튀와 토슈즈를 꺼내어 가슴에 꼭 안고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지 분명치 않은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언제 울었더냐? 싶을 정도로 평화롭게 자는 아기를 들여다보며 ‘아가야 미안해’를 수없이 되뇌었다. 이날 아가는 철없는 엄마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종으로 심하게 울었던 것이 아닐까. 늦은 나이에 출산한 아기. 그것도 생후 7일밖에 되지 않은 아가가 분별력 없이 행동한 엄마에게 울음으로 항거한 것은 아니었는지, 두고두고 반성할 빌미를 주었다.
딸이 태어나면 내가 못 이룬 발레에 대한 꿈을 풀어보리라 했는데 그것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딸이 엄마의 대리만족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막으신 전능 자의 뜻일 것 같다.
한국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살아도 발레를 내 곁에서 벗할 수 있게 배려해 준 남편이 고맙다. 어쩌면 놓쳐버린 대상이기에 더욱 큰 미련을 갖고 평생 가슴앓이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었을지-.
조용한 아침, 차 한잔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 차 속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들리고 그 찻잔 위로 백조가 춤을 추며 무리 지어 나른다. 이제 그곳엔 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 무리 속에 춤추고 있어야 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다.
발레는 나를 삶 속으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