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유숙자

빠리에 도착한 것은 어느 가을 저녁 무렵이다. 노을이 비끼는 샹젤리제의 건물들이 황금빛으로 덧입어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했다이번 여행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호텔로 가서 쉬는 것이 우선인데도 나는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샹제리제의 긴 거리를 따라 마냥 걸었다.

밤새 잠을 설쳐가며 생각해 두었던 장소를 골고루 배정하고 나니 뿌연 새벽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세느강이다.

 

미라보 다리를 알게 된 것은 아뽈리네에르 덕분이었다. 그의 시 '미라보 다리'를 읽기 전까지 세느강은 빠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시가를 가르며 흐른다는 것이 전부였다.

여학교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으나 그중에도 '미라보 다리'는 내 가슴을 두드린 첫사랑같이 설렜고 막연한 그리움을 키웠다.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나는 꿈 꾸며 기다리고 있다.' 꿈꾸고 기다렸던 환상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미라보 다리 위에서 세느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사랑의 향기가 물안개 같이 피어오르고 누군가 숨죽이며 기다리는 말 못할 사연도 있을 것 같았다. 많은 세월이 흘러 꿈을 접고 살 나이가 되었어도 이 시를 생각하면 가슴 설렜다.

 

발레리나의 길을 열망하면서도 접을 수밖에 없어 목울대가 잠기고 가슴이 차올라 몇 밤씩 새우며 뭔가를 쓰지 않고는 숨쉬기가 곤란했던 시절, 마치 검은 돌이 껴입은 이끼처럼 본색이 석연치 않은 갈등을 날려보낼 수 있게 만든 것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발레였다. '드가'의 발레 속의 여인은 단지 그림일 뿐이고 그것을 형상화해 그려가고 있는 내가 거기 있었다.

안개가 걷혀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이 다리 위에 서 있으니 연전에 보내 주었던 친구의 엽서 사연이 생각난다.

'이 저녁, 미라보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황혼은 어릴 적에 우리가 함께 가슴 설레며 바라보던 황혼만큼이나 곱다. 가을 나무가 옷을 모두 벗어버린 지금, 우리가 함께 읊조리던 '미라보 다리'를 생각하며 붉게 물든 하늘 저쪽 그리움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띄운다. 보고 싶다.'

 

빠리의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든 낙엽 한 장은 온통 그리움으로 절절했다. 나는 그 향기로운 영혼에 취해 시간 저 끝을 헤매고 있었다. 그 옛날 가슴 저리도록 와 닿던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우던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진다막연히 동경하고 지향하던 시절이 한참 지난 중년의 나이. 유럽 여러 도시를 거치며 감정의 물결이 잔잔해질 즈음 미라보 다리에 섰으나 세느를 내려다보는 내 가슴은 시인 만큼 뛴다.

 

세느강에는 400여 년 전에 세운 퐁네프다리로 시작해서 교각의 조각이 가장 아름다운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등 서른다섯 개의 다리가 있다. 그중에 하나인 미라보 다리는 위치도 좋지 않고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다리이건만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파리를 방문하는 사람 중에서 미라보 다리를 보지 않고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인은 강과 다리를 부각했다. 그것은 시 속에서 우러나오는 비극적 사랑의 암시 때문이리라.

 

아가위 향기같이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곳. 그곳에서 싹텄던 비극적인 사랑. 가난한 젊은 시인과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은 시인으로 하여금 미라보 다리라는 걸작을 낳게 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도 미라보 다리 아래 흐르는 세느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고 흐르는 강물 따라, 흐르는 세월 따라 젊음도 가고 지친 물살도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나는 꿈 꾸며 기다리고 있다.

해야 저물렴 종도 울리렴.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모든 것이 다 눈앞에서 사라진 다음 시인이 겪는 허전함. 사랑의 아픔을 싣고 묵묵히 흐르는 세느 강과 그 강을 내려다보며 공감하는 미라보 다리. 낯선 나그네라도 미라보 다리 위에 서면 시인이 되어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2001)